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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수원교구 안성본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2-21 수정일 2012-02-21 발행일 2012-02-26 제 278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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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회 경제·교육 선구자로 영향 미쳐
초기 교회 토착화의 대표 사례
한국 한옥-프랑스 양식 절충
성당 건축사 사료로도 중요
1900년 전·후반은 새로운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각 지역사회 내 본당 설립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의 전파일 뿐 아니라, 보다 발전된 생활문화 확산의 통로가 됐다. 특히 각 본당들은 농촌지역 경제적 자립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리매김했다.

수원교구 안성본당(주임 이정혁 신부)의 이름을 언급하면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도 ‘포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큼 유명해진 ‘안성 포도’재배가 안성성당 텃밭에서 시작됐고, 초대 주임신부는 지역민들에게 농장 토지를 임대해 각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왔던 역사적 배경이 이어진 덕분이다. 이 포도밭 일부는 현재까지도 옛 성당 뒤편에 남아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신앙의 터, 안성본당의 선교 뿌리를 찾아들어가 본다.

한국교회 초기, 전국 각 지역에 설립된 본당들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의 굳은 신앙과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졌다. 당시 선교사들은 서양문화에 반기를 들거나 곡해하는 주민들의 핍박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다.

수원교구 안성본당 초대 주임인 공베르 앙트완(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도 스스로가 ‘불청객’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지역 주민들은 신부를 해치기 위해 그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었고, 거처를 파괴하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공베르 신부 또한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매진했다. 가난한 이들과는 먹거리를, 아픈 이들과는 약을 아낌없이 나누었고, 성당 뜰 안에 놀러온 어린이들과는 ‘서양 과일’ 포도를 나눠먹으며 친구가 되기도 했다. 공베르 신부가 늘 강조했던 ‘하늘나라의 씨앗’ 은 오래지 않아 튼실한 열매를 맺었다. ‘이방인’이었던 그가 목자로서뿐 아니라 ‘지역 유지’로서 존경받게 된 것이다.

경기도 안성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00년대 후반 박해시대로 추정된다. 기록에서 처음으로 교우촌이 등장한 때는 1883년이었다. 당시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지역 사목 담당자였던 두세 신부는 그 해 안성지역을 방문해 ‘바울 공소’를 설립했다. 이 공소는 훗날 안성본당의 기원이 됐다.

이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안성지역 방문을 계기로 지역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드디어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본당이 설립됐다.

1927년 성당 앞에서 촬영된 신자들의 기념 사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성당 모습이 뒤쪽으로 보인다.
본당 첫 사목자로 부임한 공베르 신부는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큰 힘을 기울였다. 특히 공베르 신부는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기 위해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실험재배 등에 나서기도 했다. 또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지역민 전체를 품어 안았다.

안성본당사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안법고등학교 설립과 운영이다. 공베르 신부와 교회에 대한 오해가 풀리자, 안성지역 유지들과 고관들은 신부를 찾아와 올바른 교육과정을 갖춘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을 요청했다. 어린이들의 도덕교육을 맡아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공베르 신부는 한국이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고 또한 본당 선교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 1909년 사립 공교 안법학교를 설립한다.

‘공교’는 공번된 교회라는 뜻이다. 성당 내에 있던 초가집에서 남학생 25명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친 것이 학교의 시작이었다. 1912년에는 안성지역에서 처음으로 여성교육도 실시했다. 이후 1949년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교육은 중단됐지만, 안법 중?고등학교는 지역사회 명문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아울러 공베르 신부는 3·1 독립운동 당시, 일본군에게 쫓기는 주민들을 성당으로 피신시키고, 프랑스 국기를 내걸어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주민들을 보호하는데 앞장서 더욱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공베르 신부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에 납치됐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견디지 못하고 선종한 그의 그림자는 역사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본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신자들은 한뜻으로 새 성당 건립에도 나섰다.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성당은 신자 개개인이 소와 땅을 팔아 모은 기금과 공베르 신부의 모국인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준 기부금으로 지어 올려졌다.

▼ 1900년에 설립돼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안성성당의 옛 건물.
성당은 한국 한옥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해 지어 초기 성당 건축사 연구 사료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성당은 한국 전통 목조기법을 바탕으로 외래종교인 가톨릭교회의 전례공간을 수용한 독특한 형태를 보여 더욱 관심을 모은다. 초기교회의 토착화를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경기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성당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아, 아무 때나 들어가 볼 수는 없다.

현재 안성성당의 마당에 들어서면 근대의 건축미를 물씬 풍기는 단아한 옛 성당과 위풍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는 새 성당의 정문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다. 새 성당의 끄트머리이자 나란히 선 두 성당 가운데 즈음에는 ‘미래의 십자가’가 자리한다. 지난 100여 년의 역사를 발판으로 미래 100년의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고자, ‘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본당 신자들의 뜻을 담은 모습이다.

안성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현재의 성당과 옛 성당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왼쪽이 현재의 성당, 오른쪽이 과거의 성당.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