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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유산 순례] 15. 조선 신자들이 교황께 보낸 서한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23 제 207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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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성직자 영입 위해 교황청에 직접 청원 시도
주교 파견 요청… 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
풍비박산 난 조선교회 재건 노력 돋보여
『교황 성하의 옥좌 밑에 올리나이다.

저희들(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그 밖의 여러 죄인들은 몸을 떨고 겸손되이 인사를 거듭 드리며, 성하의 옥좌 밑에 감히 이 글월을 드리나이다. 너무 외람된 일일 것이오나, 성하의 끊임없는 건강과 만복을 감히 축원하나이다. 주(문모)신부님이 처형된 후, 저희들 나라에는 30여 년 동안이나 목자가 하나도 없었나이다.

이동안 성하의 양들인 저희들은 양식이 도무지 없었사옵고, 슬픔과 비탄 속에 빠져 있었나이다… 그러하온데 지금 또 아주 다행스럽게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주교가 되신 소주교께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에 만 번 위험을 당하시고, 천 가지 노고와 백 가지 고초를 겪으시면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서든지 저희들 나라에 들어오고자 하시나이다…. 이러한 은혜는 저희 나라의 모든 영혼을 구하기 원하시는 천주의 특은으로, 저희들에게 내려진 것임을 확신하고, 저희들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도록 감격하나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1835년 1월 19일자로 북경 남당에서 조선대목구 밀사 유진길, 조신철, 김방제가 쓴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1835년은 기해박해로 조선교회가 풍비박산이 난 이후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과 함께 교회 복구와 제 2차 중흥기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조선교회는 이 때 매년 유진길, 조신철, 김프란치스코를 북경에 밀사로 보내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했고, 보다 적극적인 성직자 영입운동의 일환으로 이처럼 교황에게 직접 서한을 올리는 작업을 시도했다.

조선교회 신자들이 교황에게 서한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제 2차 성직자 영입운동을 착수하면서 부터이다.

처음에는 북경 주교가 그 대상이었으나 보다 적극적인 성직자 영입을 위해 교황청에 직접 청원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사실 조선교회 신자와 교황과의 연계발상은 「황사영 백서」에 처음 나타난다. 그 뒤 1811년 권기인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조선교회 재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교황께 주교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교구 설정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825년 정하상과 유진길이 보낸 교황 청원서는 당시 교황청 포교성 성장관이던 카펠라리 추기경을 크게 감동시켰고,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1830년 즉위하자 조선교회를 위한 성직자 파견만이 아니라, 조선교구 설정 및 영속적 교정대책을 강구토록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난 7월 초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로부터 영구 기증, 반환 받은 1835년 1월 19일자로 조선교회 신자들이 교황께 올린 서한이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하겠다. 이 편지는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