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달수 신부의 묵시록 연구] 7. 일곱 교회

전달수 신부·안동 다인본당 주임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09 제 207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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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회개만이 구원의 길 
성찰 통한 변화된 삶 살아
2. 일곱 교회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가짜 지도자로 판명되어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척받을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다른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는 이들도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다. 성령의 은사 사용과 윤리생활이 일치되면 금상첨화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성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가끔 체험한다.

그 당시 사도의 진위를 가려내는 기준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를 참조할 수 있다. 디다케의 제 3부 교회 규범(11-15장)에 의하면, 떠돌이 사도들은 돈을 요구하거나 한 곳에서 사흘 이상 머물며 생활 태도가 좋지 않은 자들이다. 물론 이 규범이 100년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집필한 것이므로 그 당시 교회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참고할 수는 있다. 에페소 교회가 진짜 사도들과 가짜 사도들을 구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그 교회의 장점이라 하겠다. 이 교회가 지닌 또 다른 장점은 니꼴라오파의 소행을 미워하여 그 당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점이다. 니꼴라오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두 가지만 소개하면 이러하다. 고전적 해석에 의하면, 이 파의 주창자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니꼴라우스이다. 그들은 에페소와 뻬르가모 교회 안에 드러난 이단의 한 파이며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우상에게 드린 예물과 음행을 피해야 하는데도 그 규정을 지키지 않고 그런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 이레네오의 반 이단론 (Adv. Haeres. Iㆍ26ㆍ3:IIIㆍ11ㆍ1)에 의하면 니꼴라우스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부제 중의 하나였다. 또한 히뽈리뚜스(Hippolytus)의 철학논문집(Philosophoumena VI. 36)에서도 그 주창자를 이레네오 성인과 같이 본 듯하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Clemens Alexandrianus Titus Flavius)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니꼴라오 자신은 실제로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는데 그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의 사상을 잘못 가르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였으며 교회사가 에우세비오도 자신이 쓴 교회사에서 끌레멘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런 상이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세기 경 영지주의와 결탁된 듯하며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 성서학자들은 니꼴라우스란 이름을 단지 은유적이며 『백성의 정복자』라는 의미로 보고 있다.

이런 좋은 점들을 지녔던 에페소 교회도 잘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교회 구성원들이 하느님께 대해 처음에 지녔던 사랑과 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과 열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성취해 나갈 때 열성을 가진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하느님을 알게 된 어느 외교인이 열심히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다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열성이 식어지는 경우가 있다. 비단 이런 신자들 뿐 아니라 구교우들과 소위 열심하다는 신자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잦은 성찰과 반성, 피정이나 연수, 고해성사를 통해 주님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변화된 삶만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다. 묵시록은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만일 그렇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너의 등경을 치워 버리겠다』(2, 5).

그러므로 진심으로 회심하여(metanoia) 주님께 가졌던 열성과 사랑을 다시 찾아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교회는 성모신심 열기로 가득 차 있다. 현 교황님의 열성과 콜베 신부님의 시성 그리고 스테파노 곱비 신부님의 활동 등으로 인해 공의회 이후에 다소 식었던 것처럼 보인 성모신심이 되살아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성모신심 세미나와 성모 발현지 순례 등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이 신심을 깨우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바람직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많이 바치며 성모님의 발현지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신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에서 나온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모두 기도와 회개로 낙착된다. 성서의 가르침과 성모님의 메시지가 일치하는 것도 참으로 신기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기도와 회개만이 살 길이 아니겠는가?

전달수 신부·안동 다인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