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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22) 아편전쟁 후의 천주교-교회재산 반환문제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02 제 207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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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당 터에 서원 묘지 등 들어서 반환 요구에 주민들과 마찰 야기
청암교난으로 「반교운동」 막 올라
◆교회재산 반환

예수회 브시(羅伯濟) 신부가 동가도에 주교좌성당을 건립하였으며 1847년 서가휘에 예수회 중국본부를 짓고 학교 도서관을 지었다. 1861년 서가휘에 천문대를 설치하여 최초로 폭풍을 예보하였으며 항해하는 선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가휘는 교우촌이었으며 서광계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구 성당 터에 사(절), 민간 신앙인 묘, 창고, 서원, 묘지가 들어서 있어 구 성당 터 반환을 요구하는 주민들과 굉장한 마찰이 생겼고 구타사건과 법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성당 터가 묘지가 되었는데 그곳에 성당을 건립하려고 하자 묘의 후손들이 주민들과 합세하여 크게 충동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구 성당 터가 어느 곳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강주에서는 서양선교사가 환당(還堂)을 요구하였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동옹서원 터가 구 성당 자리라고 반환을 요구했는데 관청에서는 유생들의 아들들이 공부하는 서원을 천주교회에 돌려줄 수 없어 결국 배상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났으며 천주교에 대한 큰 불만을 갖게 하였다.

1866년 섬서성 서안에서는 구 성당 터가 한림원 편수 장대남의 후손의 집이 되었다. 장대남의 후손과 교회가 서로 다투다가 결국 프랑스 공사의 위협으로 1백56칸짜리 집이 교회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원성을 사게 되었다. 1866년 남경 구 성당 터에는 큰 마을 창고가 서 있는데 지방관이 대신 다른 곳의 땅을 주었지만 그곳은 습하고 좋지 않았다. 남경은 비가 많이 오는 곳이다. 침수되는 곳에 성당을 건립할 수 없으므로 프랑스 공사가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군함을 파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군함이 파견되면 하루 1천 냥을 지불해야 되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므로 지방관이 어느 곳이든지 좋은 곳을 찾아 선택하라고 하였다. 북경의 선교사는 50년 전에 몰수된 교회 전지가 진문림의 전지가 되어 있는데 73무(畝)를 환수하였다. 이런 교회재산 반환문제는 직예성,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강서성, 절강성, 강소성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이런 문제로 천주교를 구시하게 되었다. 특히 서양 열강의 힘을 빌려 지방관을 굴복시킨 일들은 반교운동의 한 원인이 되었다.

◆청암교난

청암교난은 북경조약 체결 후 첫 번째 일어난 교난이다. 사실 청암교난이 첫 번째 교난이라 하지만 청암교난 이전 1856녀부터 1860년까지 대소교난이 16번이나 일어났으며 선교사와 교우가 13명이나 살해되고 부상자가 1백여 명이 넘었으며 충군되어 고역을 당한 교우가 20여 명이나 되었다.

1860년 18명의 선교사가 귀주성 각처에서 성당을 세우고 선교를 하였다. 귀주성은 중국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고 험한 산으로 되어있으며 평균 해발 1천 미터이며 묘족, 이족, 장족, 한족 등이 살고 있다.

귀주성은 1575년 마카오 교구에 속해 있다가 1846년에는 귀주대목구가 되었으며 1853년에는 교우가 2천여 명되었다.

포리에 신부가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 내에 소규모 신학교도 세우고 인쇄소도 설치하여 교구월보도 발행하였다.

포리에 주교는 1860년 주교로 승품되었는데 1861년 관리들이 타는 자색 가마를 타고 북치는 사람을 동원하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거리를 다니며 천진조약과 북경조약 체결 축하 행렬을 벌인데서 문제의 발단이 시작되었다.

중국 관리들과 유지들은 이 일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포리에 주교는 먼저 순무 하관영의 관부로 가서 『허가증을 봉정하라』고 요구하고 지금부터는 내지에서 마음대로 선교할 수 있으며 조약에 보호 조항이 있으므로 지방관도 관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흥서는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기위해 파견되었는데 천주교를 매우 구시하고 있었다. 1861년 전흥서는 불법적으로 공문을 보내 귀주성 내 관리들에게 구교운동을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또 그 업적에 따라 관리들 성적을 평가하겠다고 하였다. 묘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던 단련(지주계급의 무장세력)을 동원하였으며 지방 유지들이 반교 전단을 인쇄하여 각지에 산포하였다. 성당이 파괴되고 신학생 세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 복자 장문란과 나정음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청암교난은 반양교운동의 서막을 올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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