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53 을해박해 순교자 김화준과 김윤덕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회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02 제 207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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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준 - 온갖 문초ㆍ형벌ㆍ유혹 물리쳐
김육덕 - 미친 사람 취급…매맞아 순교

지방에서의 박해로 인해 순교한 신자들의 기록은 엉성한 경우가 많다. 또 신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순교 행적이 분명하지 않아서 그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하는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가 분명한 경우라면, 전승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전통에 따라,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나가야 하는 신앙후손들로서는 이들을 순교자로 공경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을해박해로 인해 경상도에서 체포된 신자들도 대부분 기록이 미비한 편이다. 특히 관찰기록의 경우에는 경상감사의 보고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안동과 경주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문과 굶주림으로 인해 죽은 신자들, 대구감영에서 병사하거나 매를 맞아 죽은 신자들 가운데서 「과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히 증거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구에서 참수형과 장사로 순교한 김화준 야고보와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에게서 위안을 얻게 된다.

김화준 야고보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사양면 신왕리)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 퍼져 있는 복음을 듣고 입교하였다. 본래 성격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많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자신의 본성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영혼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또 성교회의 규구(規矩)를 충실히 지키며 부지런히 교회서적을 읽고 남에게 교리를 전하였다.

그 후 잦은 박해로 인해 수계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야고보는 가족들과 함께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15년 부활절에 체포되었고, 이내 경주를 거쳐 대구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동안 야고보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언제나 이를 견디어냈고, 관장의 갖은 유혹과 약속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록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순교 행적을 알 수는 없다. 그가 대구감영에서 순교한 날짜는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이전이었다.

김윤덕 아다가 막달레나는 상주 땅 은재(이안면 저음리) 출신으로, 입교한 뒤 청송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을해박해의 순교자들이 대부분 충청도 출신이었던 데 비해, 아가다 막달레나는 경상도 산골에 전파된 복음을 듣고 입교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언니와 형부인 박씨네 가족들도 복음을 받아들여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15년의 박해로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아가다 막달레나는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이를 참아냈다. 이에 형리들이 『무식하기도 하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할지라도 조물주이신 주님의 은혜를 모르고 그분을 배신할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항구한 신앙을 지녔던 탓에 대구로 압송된 후에 다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육신의 괴로움은 신앙의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아가다 막달레나도 이처럼 끝까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리고 막 옥문을 나가려 할 때,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오던 김종한(안드레아)을 만나 그로부터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아가다 막달레나는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힘에 겨워서 주님을 배반했는데, 이제는 그 크나큰 죄를 반성하며 더 이상 그분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감사는 이에 놀라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여 내쫓으라고 하였지만, 계속하여 신앙을 증거하자 할 수 없이 그녀를 결박하고 배교할 때까지 매를 치라고 명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가다 막달레나의 살점은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감사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하였으니, 그 옥문이 바로 그녀에게는 천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때가 1815년 5월로, 그녀의 나이는 대략 50세였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