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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21) 아편전쟁 후의 천주교-선교사들 내지 침투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0-19 제 207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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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 신부 천진 사목 중 체포…광주로 충군
프랑스 마뢰 신부 주민들의 고발로 서림에서 참수
「서림교난」으로 제2차 아편전쟁 발생
◆선교사들 내지 침투

라지리스트회 선교사 두 명은 라마승의 옷을 입고 서장까지 들어갔으며 서양 선교사가 열하의 조양현에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하였다. 물리주교는 1858년 천진에 상주 신부를 천진에 파견하였다. 구 신부는 시약소를 내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구 신부에게「매국죄」「외국인과 내왕한 죄」를 적용하여 심한 형벌을 한 후에 광주로 충군시켰다.

서림은 광서성 서부 변경에 있으며 산이 높고 밀림지대이므로 교통이 불편하고 인구가 적고 낙후된 지역이다. 여러 개의 소수민족과 한족이 섞여 살고 있으며 주민들 대부분이 가난하였다. 통상 항구 밖에서 선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았던 1856년 프랑스 출신의 마뢰 신부가 이족(소수민족)의 복장을 입고 이곳에 들어와 이족 3명을 입교시켰으며 복녀 조계영(아녜스)과 복지 백소만(라우렌시오)도 입교시켰다. 마뢰 신부와 전도원의 노력으로 서림현 외에 정안, 상정, 판파, 나만 백가제, 요촌 등지에 계속 입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마뢰 신부는 주민들이 병이 나면 약품을 주어 치료하여 주었다. 묘족 이족 한족들이 제사를 열심히 지냈는데 마뢰 신부는 조상의 신위를 완전히 없애야 세례를 주었으며 조상의 묘에도 절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주민들이 마뢰 신부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었다.

신입교우 백삼이 조상의 신위를 제거하자 일가문중이 전부 들고 일어나 마뢰 신부를 고발하였으나 지방관이 크게 문제 삼지 않아 무마되었다.

마뢰 신부가 혼인 문제까지 관여한다고 주민들이 불만을 가진데다가 부녀에게 고해성사 주는 것을 스캔들을 만들어 고발하였다. 새로 부임한 지현 장명봉이 병사를 보내어 마뢰 신부와 백소만, 조계영을 체포하였다. 마뢰 신부를 마구 구타하므로 마뢰 신부는 사망한 것처럼 쓰러져 있었는데 장명봉이 또 50판을 결장하라고 명령을 내림으로 마뢰 신부는 화가 나서 장명봉에게 이미 천주교 선교가 허락이 났는데 사람을 이처럼 구타하는 것은 위법이라 하자 장명봉은 화가 나서 마뢰 신부를 참수하여 목을 남문 외에 효시하였다.

장계영은「참수농치사형」을 과했는데 이 형은 농 속에 가두어 세워서 죽게 하는 형이다. 조계형은 농 속에 25일 간이나 세워져 있으면서도 배교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산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치명하였다. 백소만은 남문 외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서림교난」을 구실로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청조를 위협하여 1858년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중-불 간에 천진조약으로 선교사가 5개 통상 항구 외에 중국 내지 어디에서나 선교할 수 있으며 보호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뒤이어 1860년 10월 24일 중 영간에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동년 10월 25일 중-불간에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선교사 드라마르는 프랑스군에 종군하고 있었는데 북경조약 번역관으로 참석하여 중국 측의 무지함을 이용하여 프랑스 측의 요구에 포함되지 않고 프랑스 원문에는 없는 조항을 만들어 중국 측 조약문을 슬쩍 끼워 넣었다. 내용은『중국 내지에 선교사가 토지나 가옥을 구입하여 건축할 수 있고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교회재산 반환문제

북경조약 제6조에 정부에 몰수된 성당, 전지, 학당, 묘지 등을 환원한다는 내용이 있다. 북경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846년 청정부에서 교회재산을 반환하겠다고 한 일이 있다.

1851년 라자리스트회 프랑스 출신의 띠오모띠 신부는 정해로 들어가서 성당을 건립하고 복건성에서 선교하던 중국인 방안지 신부를 정해로 파견하여 선교하게 하였다.

1851년 12월 방 신부는 교우들과 구 성당 터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구 성당 터에는 사묘와 암자가 세워져 있었다. 방 신부와 교우들은 사묘와 암자를 반환해 달라고 지방관에게 요청하였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방 신부와 교우들을 축출하였다. 띠오모띠 신부는 상해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영사를 대동하고 지방관을 찾아가 영파, 정해 구 성당 터를 반환해 주지 않으면 곧 군함을 파견하겠다고 위협하였으며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천주교와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불만과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예수회에서는 1946년 8월 상해 관청에 구 성당 터 반환을 요청하여 동가도, 양경빈, 파농 3개 지방을 환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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