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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순교혈사] 52 아우 배교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신앙으로 순교한 김강이(시몬)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0-19 제 207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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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 버리고 수계생활에만 전면
깊은 신앙심에 매질하던 사령들 감동

『강원도의 넓은 산악지대는 박해를 피해 이리 저리 흩어지는 신자들에게 훌륭한 피신처가 되어 신유박해 이래로 많은 신자들이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경상도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의 밀고로 인해 박해가 그곳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곳 수부(首府)인 원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큰 반항을 일으키게 되었다.』이 말은 성 다블뤼 주교가 교회의 전승기록을 토대로 하여 이 박해로 인해 강원도 원주에서 순교한 김강이(시몬)의 아름다운 순교 행적을 적으면서 기록한 첫 구절이다.

충청도 서산지방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출생한 김강이 시몬은 신자들 사이에서 일명「여생」으로도 불려졌다. 본래 성격이 고상하고 용감하였던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교리를 받아들였으며, 진리에 대한 믿음이 점차 깊어지게 되자 모든 재산과 종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자신의 가족과 아우인 김창귀(타대오)와 함께 고향을 떠나 교우들이 거주하는 전라도 고산 땅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 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교우촌을 순방하던 도중에 고산 땅에 도착하게 되자 시몬은 목자를 만난 기쁨으로 얼마 동안을 주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일어난 1801년의 박해로 피신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관청에서는 이미 그가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방으로 포졸들을 보내 탐문하였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때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1년 만에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시몬은 갖은 고초를 다 겪어야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등짐장사를 하였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처음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자유롭게 수계생활을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경상도 산간지대로 이주하기로 작정하고, 자신을 따라나선 교우들과 함께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에 들어가 자그만한 교우촌을 이룩하였다. 그런 다음에 자신은 다시 강원도 울진으로 옮겨가서 생활하였다.

1815년, 박해가 일어나 경상도의 교우촌들이 폐허가 되어갈 무렵, 시몬은 옛날 하인의 밀고로 울진에서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 갇히게 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여러 교우들이 투옥되어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를 본 그는 관장에게 청하여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산을 돌려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고, 끝내는 이를 돌려받아 교우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안동에서 일차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시몬은 아우인 타대오와 함께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죄인이 평소에 생활하던 곳에서 재판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곳에는 몇몇 교우들이 갇혀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아우 타대오도 이곳에서 형벌 문초를 받는 동안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마음은 굳건하였다.

그가 어찌나 형벌을 잘 참아내고, 갖은 유혹을 물리치면서 열렬한 신앙심과 인내심을 보여 주었는지, 매질하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용맹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차례 형벌을 받는 동안 이제 그의 몸은 너무나 유린되어 지탱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마침내 감사는『아우가 마음을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옳다고 여겨 오랫동안 이에 깊이 빠졌고, 못된 교리로 남을 미혹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집행을 허락 받기 위해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굳이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형벌로 인해 상처가 심해진데다가 심한 이질까지 걸려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을 때, 감사는 형을 집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시몬은 1815년 11월 5일 그리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가 넘었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