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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20) 아편전쟁 후의 천주교-불평등 조약 시기 (1)

서양자 수녀ㆍ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17 수정일 2012-02-17 발행일 1997-09-14 제 207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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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통상항구에만 선교 허락
선교사들 변장 후 내륙 선교 시도
잡히면 사형 혹은 마카오로 추방
중국은 1800년 아편을 금지하고 양귀비 재배를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아편전쟁 전 70년간 영국인을 비롯한 서양 상인들은 해마다 아편을 실어다 중국에 팔았다.

건륭 38년(1773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을 갖다가 전매하였는데 그때 벌써 매년 1천 상자의 아편을 중국에다 수출하였다.

가경년간(1796~1820년)에 이르러서는 매년 중국에 대한 아편 수출량이 4천여 상자에 달하였으며 아편전쟁 직전 몇 년간에는 매년 4만 상자에 달하였다.

영국은 아편을 가장 유리한 상품으로 보았다. 인도에서 아편을 가져와 중국에 판매하여 1천 배의 이익이 남을 뿐만 아니라 흡식하면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아편 판매를 하던 영국 상인들은 대 부호가 되고 귀족의 작위까지 받기도 하였다.

◆1840~42년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1840년 시작하여 1842년 8월에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중국은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5개 통상항구를 허용하게 되었다. 영국 상품 및 아편이 대량으로 중국에 들어갔으며 홍콩을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까지 물게 되었다.

◆선교사들 통역 비서 역할

선교사들은 「중국통」으로 중국 풍속과 중국 사정을 잘 알고 중국어에 능통하므로 선교사들이 불평등조약 뿐만 아니라 상업상 모든 계약을 체결하는데 통역을 맡아야 했다. 남경조약 조약문 작성자는 선교사 모리슨이었으며 망하조약의 미국 전권대사 카싱의 중문 비서는 선교사 파크와 브릿지맨이었다.

프랑스는 1844년 10월 24일 중국과 황포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천주교의 포교에 대하여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인은 통상항구에 성당을 건축하고 묘지를 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전권대사인 라르네의 일급 보좌관은 선교사 칼레였다. 중국 정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통상항구 외에는 선교하는 것을 강력히 제한하였다.

◆아편전쟁 후 교세 확장

아편전쟁 후 천주교는 비교적 발전이 크게 되었다. 교회 내부 조직도 날로 엄밀하게 체계가 잡혔다. 1846년부터 1856년까지 교무가 신속히 발전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에서 섬서, 호광, 강서, 운남, 홍콩을 추가로 대목구로 설정하였다.

프랑스는 제3공화국 탄생 후에도 국외 천주교 보교권을 중시하였다. 아편전쟁 전에는 보교권이 포르투갈에 있었으나 1843년 프랑스 출신의 물리(맹진생) 신부를 북경 주교로 임명하면서 보교권은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태리와 독일도 보교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57년 건륭제는 폐관정책을 제정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기 힘들었으며 예수회가 1773년 해산되어 중국 천주교는 거의 선교가 정지 상태가 되었다. 중국 교우들은 예수회 회원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회가 구라파에서 1814년 회복되자 1832년 4월 25일 예수회 총장에게 선교사 파견 요청을 하였으며 북경 교우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도 예수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여 회답을 얻어 내었다.

중국 교우들은 하남성, 호북성, 섬서성, 산서성 등지에서 예수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예수회 총장은 토뜨랑 신부, 에스티므 신부, 브로띠르 신부를 파견하여 1842년 7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계속 예수회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물리 주교는 동당 북당 서당을 환수하였으며 남당과 책란(묘지)도 이미 환수했었다. 선교사 묘지인 정복사도 돌려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환수하지 못했다. 정복사는 1732년 선교사의 묘지가 되었으며 과일나무 4백여 주와 포도나무 1백20여 주를 심고 주위 담은 벽돌로 쌓았는데 박해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주민들이 묘지를 파괴하였다.

◆선교사들 내지 침투

선교사들이 통상항구에서만 성당을 건립하고 선교를 하게되어 있었는데 영국 프랑스 이태리 포르투갈 등 7개국 선교사들은 중국인처럼 변발을 하고 혹은 중국의 소수 민족들로 변장을 하고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함풍제는 엄하게 조사하라고 내렸으며 어떤 선교사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혹은 마카오로 구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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