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지방시대 지방교회를 연다] 9. 전주교구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12-02-17 수정일 2012-02-17 발행일 1997-09-14 제 207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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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신앙생활 위해 총력
전 신자 성서 통독ㆍ기도 봉헌에 전력
「교회 사명에 충실」 교구 의지 확고
"이 교구가 사는 것은 한국 가톨릭이 사는 것이요 이 교구가 완성되지 못하면 한국 가톨릭이 죽는 것" -「가톨릭 조선」지에서

내실화의 시기

전주교구는 올해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이한다.

순교 교구이자 한국교회 내 첫 한국인 자치교구인 전주교구는 2천년 대희년을 준비하고 때 맞추어 맞은 교구 설정 60주년을 계기로 내실화 작업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주교구는 60주년 기념 표어도 「새롭게 하소서」로 정하기도 했다.

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전주교구가 앞으로 벌일 사목 방향에 대해 『무엇을 평가할 때 건물이나 신자 수 등 외적인 경향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종교는 계수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전주교구는 모든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정말 보람된 신앙의 맛을 느끼며 사는 공동체가 되도록 사목의 물줄기를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전주교구는 정말 살맛나는 신앙생활을 위해 각종 프로그램을 유치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권유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작업이 2천년 대희년 그리스도의 해인 올해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발표한 사목교서를 통해 밝힌 전 교구민 성서 통독운동이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계시헌장 25항)이라는 지침에 따라 모든 신자들이 성서를 구약부터 신약까지 통독할 수 있도록 통독표와 통독 노트를 발간하는 한편 문맹자들을 위해 성서 낭송 테잎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등 교구의 힘을 아끼지 않고 있다.

2천년 대희년까지 모든 교구민들이 성서를 한 번 이상은 완독하도록 하기 위해 교구에서는 앞으로 성서교실을 보다 다양하게 활성화시킬 계획으로 있다.

아울러 성서를 통해 발견한 신앙의 기쁨을 생활 속에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구에서는 성서 통독과 함께 기도운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성당 방문시 성체조배 5분 먼저 하기 캠페인 등 일회적 행사 구호가 아니라 신자들이 기도를 습관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병호 주교는 이와 관련해 『신앙을 연구 내지는 공부만 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계산이지 신앙이 아니다』며 『신앙은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교구 의지에 따라 최근 설립한 신학원도 연구와 공부보다는 신앙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방향으로 체제를 잡고 있다.

신앙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잘못하면 시작할 때의 순수한 열정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에 따라 전주교구 가톨릭 신학원은 신앙지식이 유기적으로 통합돼 단순하면서도 신앙의 활력을 불어넣는데 역점을 둘 계획이다.

교구의 모든 체제를 신앙의 원천인 성서와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 전주교구는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본질인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 선교본당을 도입하기도 했다.

성직자들이 먼저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 세상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도입한 선교본당제도는 제도 자체보다 교회의 사명을 보다 충실히 실천하려는 교구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교구민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

피로 이룬 교구사

외적 성장보다 한 사람의 진실한 신앙인을 만들기 위한 내실화 작업에 최대의 역점을 두고 있는 전주교구의 역사는 한마디로 피의 대물림이요 형극과 영광의 길이었다.

1784년 한국교회 창설과 때를 같이해 호남의 사도 유항검이 영세함으로써 시작된 전주교구 복음의 역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을 비롯해 유항검 유 요한 이 누갈다 동정 부부와 성 정문호 등 7위 성인 및 끊임없이 이어진 1만여 명의 순교 행렬은 한국교회 1백년 순교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막대기로 재를 두드릴수록 일어나는 불길 같은 신앙을 증거한 신앙선조를 모신 전주교구는 1937년 4월 13일 한국교회 내 첫 한국인 자치교구로 탄생하게 된다.

당시 한국교회의 자랑이요 긍지인 자치교구의 탄생은 빛나는 신앙 전통에 견주어 볼 때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치교구의 설정은 한국교회가 외국인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으로부터 한국인에 의한 교회 관리라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당시 「가톨릭 조선」지는 자치교구 탄생을 축하하며 『이 교구를 살리는 것은 한국 가톨릭이 사는 것이요, 이 교구가 완성되지 못하면 한국 가톨릭이 죽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교구 설정 당시 교세는 한국인 신부 15명 본당 14개 신자 수 1만9천3백 명 공소 1백77개였으며 이는 현재 사제 수 1백46명 본당 65개 신자 수 14만으로 성장해 전주교구가 자신들의 전통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주교구의 남다른 신앙의식과 역사의식은 꾸준히 이어져 일제시대에서는 외국인 선교사 중심의 한국교회가 선교 우월주의와 교회 보호라는 명목에 빠져 일제의 침략을 묵인해 오던 것과 달리 많은 교구 신부들이 일제의 폭거에 저항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지식인 신자들은 정신계몽 운동과 문화운동을 펼쳤으며 민족의 생명인 언어를 지키기 위해 우리말 사랑 운동을 전개하고 한글 보급에도 앞장섰다.

해방 후 민족교육 재건운동과 각종 사회 문화 활동으로 지역민들을 계도하던 전주교구는 한국전쟁 당시 8개 본당 지역에서 70여 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7ㆍ80년대 전주교구는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면서도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등 자치교구로서의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

자치교구로서의 전주교구의 모습은 평신도 활동에도 그대로 이어져 타 교구와 달리 보다 활력적이고 자율적인 평신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 사도직이 강조된 다음해인 1966년 전주교구는 전국에서 최초로 본당 사목회의 전신인 「본당 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또한 현재 교구보인 「숲정이」를 평협회에서 발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어느 교구보다 빨리 교구 재무평의회에 평신도들이 적극 참여했고 평협의 예산으로 교구비가 책정되고 있다.

평협의 활발한 교회 참여 활동은 모든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사목자들과 공동보조를 맞추게 해 민주화 운동과 농촌 살리기 운동에 적극 헌신하게 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자치교구로서 지역민과의 호흡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온 전주교구는 내적으로는 신앙의 내실화에 충실하면서 외적으로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구현에 앞장서고 있다.

올해의 교구 설정 60주년 행사를 단순한 교회 행사가 아니라 전북 도민의 축제로 이끌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며 선교 본당을 도입해 신자가 없는 지역에도 사제를 파견하고 북한 동포 돕기에도 앞장서는 등 모든 지역 현안에 지역민들과 긴 호흡을 나누고 있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생동감 있는 신앙 감각 안에서 모든 이가 기쁨의 생활을 하고 모든 이가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사목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전주교구는 선조들이 이룩한 자랑스런 역사를 돌아보며 더욱 자랑스런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오늘도 여념이 없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