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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19) 도광제의 박해(가경제~아편전쟁까지) (2)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17 수정일 2012-02-17 발행일 1997-09-07 제 206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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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부와르 얼굴 40대 맞고 교수형
하 아가다 전족으로 한평생 종살이
우 바오로 귀족 출신… 구타 당해 순교
◆페르부와르 신부

페르부와르 신부는 1996년 6월 2일 시성되었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1802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였다. 1818년 12월 라자리스트회에 입회하여 1826년 9월 23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덕행이 높았는데 1832년 동생이 사망하여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동생이 사망한 후 본가에 10여 일 가 있으면서 가족들에게 중국 선교의 뜻을 말하자 가족들은 모두 만류하였다고 하며 페르부와르 신부가 장상에게 중국 선교를 지망하자 장상은 그가 몸이 약하다고 허락을 하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청을 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었다. 의사는 페르부와르 신부가 몸이 약해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배 안에서 사망할 것 이라고 하였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1835년 3월 20일 출발하여 그해 12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다원구 교우촌에서 사목하였다. 다원구에는 1천5백여 명의 교우가 20여 촌에 흩어져 사는데 페르부와르 신부는 친구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본당은 울창한 산림 속이고 중심은 다원구입니다. 이곳은 전국 각지와 연락이 가능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페르부와르 신부가 사목한 것을 보면 최양업(토마스) 신부를 방불케 한다.

호북은 당시 상당히 태평하여 어떤 교난이 일어날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1839년 9월 15일 페르부와르 신부는 다원구에 있었다. 병사들이 갑자기 체포하러 오자 페르부와르 신부는 죽림 속에 숨었다. 병사들은 신부를 체포하지 못하자 화가 나서 문서와 책들을 불태우고 신자 몇 명을 체포하여 곡성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신입 교우가 은전 30냥이 탐나서 페르부와르 신부가 있는 곳을 밀고하여 페르부와르 신부는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그들이 압수해온 제의 한 상자와 성유 한 상자가 있었다. 법관은 성유를 가리키며 『이것이 환자의 안구로 만든 약이요?』하고 물었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법관이 배교하라고 하자 페르부와르 신부는 『나는 단지 영원한 구령을 생각하지 육신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서양 신부가 있는 곳을 대 라고 하자 페르부와르 신부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자 얼굴에 40판)을 때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페르부와르 신부는 곡성으로 압송되었다. 곡성의 판관도 성유를 가리키며 『이 약이 바로 환자의 안구로 만든 것이요?』하고 물었다. 법관은 미사경본을 내 주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페르부와르 신부가 라틴어로 읽자 이상하다는 듯이 모두 웃었다. 법관은 마음을 바꾸어 중형은 면해 주겠다고 하였다. 페르부와르 신부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자 사형선고를 내려 1840년 9월 11일 호북성 무창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동정녀 하 아가다

동정녀 하 아가다는 사천 무산현에서 태어났으며 하명옥 신부의 여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종교교육을 받았다. 호북으로 가서 선교하다가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하 아가다는 충군되어 만주 귀족의 집에 종으로 신분이 격하되어 고된 일을 하다가 71세에 그곳에서 서세하였다. 발에 전족을 하면 평지도 걷기가 힘이 드는데 동정녀들이 전족을 한 발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험한 산길을 걸어다니며 선교했다고 한다.

중국도 한국과 풍속이 비슷하여 신부나 남자 전도원이 부녀자들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신부들이 동정녀를 많이 양성하여 선교지역에 파견하여 부녀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여자수도회가 중국에 들어가기 전에 동정녀들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전도원 우 바오로

전도원 우 바오로는 만주 귀족 출신인데 교리도 가르치고 열심히 선교하였다. 그는 라자리스트회 양안덕 신부가 성당을 신축할 때 크게 도움을 주었는데 천주교를 구시하는 관원이 그를 고발하였다. 그의 발에 무거운 쇠사슬을 달아 사묘 노천에 2년 동안이나 가두었는데도 배교하지 않아 구타하여 죽였다. 그가 순교한 사묘에 후에 성당과 수녀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중국의 땅은 광활하게 넓고 인구는 많은데 사제는 얼마 안 되므로 남자 전도원을 양성하여 선교지에 파견하였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