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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18) 도광제의 박해(가경제~아편전쟁까지) (1)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17 수정일 2012-02-17 발행일 1997-08-31 제 206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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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정 - 창에 찔려 피를 많이 흘림
유문원 -「천주사교」등 온 몸에 문신
하개지 - 선행 많아 “살아 있는 성인”
◆복자 유서정

유서정 신부는 1773년 사천성 공협현의 열심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서정은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어느 신부 밑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매우 성실하고 신심이 두터우므로 사제로 키웠다고 했다.

1805년 사제품을 받고 귀주성과 천동 북부지역에서 사목을 하였다. 유 신부는 도보로 험한 길을 숨어다니며 사목을 하였는데 성령강림절 미사를 거현에 있는 교우 조상림의 집에 가서 하려고 갔는데 교우 장씨가 밀고하여 잠복해 있던 차역이 창으로 어깨를 찔러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한다.

현관이 심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정량이 떨어져 무서워 그날은 심문을 못 했다고 한다. 현관은 평소 천주교를 싫어하는 차역에게 압수해 온 제의를 입히고 한 손에는 성합을 들고 한 손에는 제병을 들게 하고, 차역 한 사람은 징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안구를 빼서 약으로 쓰고 병(제병)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천주교를 백성은 믿어서는 안 된다』외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마다 두루 다니고 돌아와서 제의를 입은 차역이 넘어져 일으키려 하니 이미 죽어 있었다 한다. 유 신부가 오현묘 지방에서 교수 치명하여 관산에 매장됐는데 1년 후 열심한 교우가 수정으로 이장하였다.

◆복자 유문원

유문현은 귀주성 귀축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흑룡강 근방 오로제 지방으로 충군되어 만주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 만주 귀족은 성격이 매우 잔인하여 가축 키우는 일을 하였는데 잠시도 쉴 시간을 주지 않았으며 화가 나면 두 엄지손가락을 묶어 기둥에 매달고 심하게 때리는가 하면 분뇨를 머리에 붓기도 하였다.

1830년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1834년 양로원에 가서 연도를 하다가 교우 2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현관은 유문원이 천주교를 믿어 충군되었다가 사면되었는데 또 믿었다고 화를 내며 그의 얼굴에 「천주사교(天主邪敎)」라는 4자를 문신하고 오른 팔에는 「광편유동」, 왼팔에는 「좌도혹중(左道惑衆)」이라고 문신하고 사형 선고를 내렸다. 유문원은 1834년 5월17일 북교장에서 교수 치명하였는데 사형 당하는 순간 화구가 머리 위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복자 하개지

하개지(로아침)는 1782년 귀주성 수문현 찰좌사 지방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개지는 어려서 솜 타는 기술을 익혔으며 동기(銅器)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대붕의 권유로 입교하여 이씨 처녀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였다. 그는 재혼하지 않고 자기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내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도와 주어 주위에서 그를 활성인이라 불렀다.

1815년 교난 때 하개지와 2백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현관은 땅 바닥에 십자가를 그려 놓고 배교의 표시로 밟게 하였다. 관에서 노인 어린이 부녀는 석방시키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40여 명에게 고문을 여러 차례 하였다. 하개지는 호한가, 미인춘, 협곤 등의 잔인한 형벌을 받았다. 하개지 몸에는 14개의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으며 고문을 많이 당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배교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현관은 40여 명의 교우 얼굴에「천주사교」라는 4자를 문신하고 신분을 격하시켜 이리 만주인 귀족의 노예로 충군시켰다. 이 때 사천성 섬서성 등지에서 체포된 신부 교우들이 이리로 충군되어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이리에 경당을 4개나 마련하고 경당 하나에 신부 한 명이 맡아 관리를 하고 교우들은 미사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회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리를 포위하여 상당히 위험하게 되었는데 회족이 관군에게 대패하자 이리에 충군되었던 교우들이 전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 신부가 은전을 하개지에게 주어 그는 귀양으로 돌아와 땅을 사서 공소를 짓는데 담을 쌓다가 실수로 옆집 나무를 부러뜨렸다. 그 집 주인이 화가 나서 경당에 있던 십자가와 성물을 가지고 관에 가서 고발을 하였다. 하개지와 교우 여러 명이 체포되어 1839년 5월 29일 법장에서 교수 치명하였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