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51 부친의 유언대로 한평생 고신극기 김희성(프라치스코)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17 수정일 2012-02-17 발행일 1997-08-31 제 2068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나무 뿌리와 도토리로 연명
깊은 신심에 관리들도 당황

박해 초부터 경상도 북부의 산간지대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은 그야말로 숨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그곳은 대부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교우촌의 이름도 산이나 골짜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불렀으며, 박해가 지나간 뒤에는 「과연 그 곳에 사람이 살았겠는가」의심할 정도로 흔적조차 없어져 버리게 되었다. 경기도나 충청도의 교우촌이 박해가 잠잠해지면서 재건되었던 것과는 달리 경상도의 교우촌들이 다시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김희성(프란치스코)이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도 이와 같은 산간지대였다. 교우들 사이에서 「경서」라고 불렸던 그는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으로 일찍부터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그의 부친은 바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훗날 공주 무성산으로 피신하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이었다.

어려서부터 글 공부에 열심이었던 덕택에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도 교리를 깊이 이해하였고, 이를 가족과 이웃에게 설명해 주곤 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순교한 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피신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녀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경상도 영양 땅의 일월산에 있는 「곧은정」(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소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대략 마흔 살이었다.

그의 부친은 순교하기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의 본을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고신극기로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라』고 하였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하루도 빠짐없이 되뇌이면서 부친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곧은정에 정착해서는 나무 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교회 서적을 읽으며 가족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조촐한 마음을 갖기 위해 늘 금욕 생활을 하였다. 사순절이 오면 엄격하게 대재를 지켰고, 부친의 유언에 따라 철저하게 고신극기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급한 성격은 차츰 양순과 인내로 바뀌게 되었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나 각처의 교우촌 신자들이 체포될 무렵, 배교자 전지수가 어떻게 알고는 프란치스코의 거처를 포졸들에게 밀고하여 들이닥치게 되었다. 산에 있다가 포졸들이 오는 것을 보게 된 프란치스코는 피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큰아들 문악이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는 천주의 명에 의해 포졸들을 따라가야 한다마는, 너는 남아서 온 가족들을 보살피고 어머니를 잘 봉양하도록 하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 다음 산에서 내려와 기쁜 얼굴로 포졸들을 대접하고는 늙으신 모친께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하면서 하직 인사를 고하였다. 또 아내에게는 시모를 잘 봉양하면서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앞으로 다시 기회가 온다면 자신의 뒤를 따라 오도록 부탁하였다.

포졸들을 따라 안동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그곳에서 김종한(안드레아), 고성대(베드로)·성운(요셉) 형제 등을 만나 더욱 순교의 원의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안동과 대구에서 형벌 가운데 보여준 항구한 신심과 해박한 교리는 관리들을 당황하도록 하기에 충분하였고, 형리들조차 그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만들었다.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그 해 말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20여 개월을 옥중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울에서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대구의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동료들과 함께 형장 근처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신자들에 의해 적당한 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