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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순교혈사] 50 성 김대건 신부 집안의 순교 신앙 이끈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16 수정일 2012-02-16 발행일 1997-08-24 제 206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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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죽는 것이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신앙의 명가이다. 그러면 이 집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기록에는 김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현이 집안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김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등이 입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딸 멜라니아와 김택현이 혼인을 하게 되었다.

김종한(안드레아)은 「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족보에는「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친 비오를 따라 형제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그는 이내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받은 덕행의 씨앗이 싹을 틔웠고,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시련을 참아낼 수 있는 신심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안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1791년의 박해와 1801년의 박해로 인해 부친 비오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가족들도 모두 박해자들로부터 감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종한 안드레아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물론 일가친척을 떠나 재산을 버리고 새 삶을 개척한다는 일은 스스로 고난에 뛰어드는 격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희망으로만 생각되었다.

이렇게 안드레아가 가족과 함께 고향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를 떠난 것은 1801년의 박해가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당시 그는 어렴풋하게 경상도 북부의 산간지대의 어느 곳에서 교우들이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촌 소재지가 워낙 비밀에 부쳐져 있었으므로 그곳 교우들을 찾지 못하였고, 영양 땅의 우련밭(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이라는 산간지대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게 되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교우촌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에 있었다.

이후 17년동안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오직 애긍에 힘쓰며, 기도와 극기생활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는 조잡한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거룩한 기쁨이 충만하였다.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주교 서적을 베껴 사방에 전파하는 일도 안드레아에게는 더없는 보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이 그 행복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로 노래산ㆍ머루산 교우촌이 파괴되고, 이어 4월 23일에는 우련밭에 살던 안드레아가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안드레아는 안동 진영에서 가혹한 문초를 받았지만, 김희성(프란치스코), 김화준(야고보) 등과 함께 이를 잘 참아낸 뒤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 문 앞에 이르러 배교하고 석방되어 나오는 김윤덕(아가다 막달레나)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안드레아는 그녀에게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십니까? 지금 착하게 죽는 것이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권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가다 막달레나는 이러한 권면에 따라 다시 관아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고, 마침내는 무수한 형벌을 받아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안드레아의 차례였다. 감사는 신앙으로 배교자의 마음을 되돌린 그를 보고는 분에 못 이겨 다른 사람보다 더 가혹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의 항구한 신앙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진리를 설명하는 그의 마음은 감사의 권위를 능가하고도 남았고, 형벌과 회유는 오히려 순교에 대한 욕구를 크게 해줄 뿐이었다.

마침내 감사는 조정에 보고를 올려 처형을 재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나지 않았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할 때를 기다리면서 옥 중에 있게 되었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