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49 동정 지키려 노력하다 뱃사공 아내가 돼버린 이시임(안나)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16 수정일 2012-02-16 발행일 1997-08-17 제 206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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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누가 마다 하리요”
을해박해 때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과 진보의 머루산 교우촌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모두 71명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반 이상이 체포된 즉시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매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옥사함으로써 대구로 압송될 때는 33명의 신자만이 남게 되었다.

또 이들 중에서도 다시 매를 맞아 죽은 신자들이 나옴으로써 7명만이 마지막까지 형벌과 고난을 이겨내고 칼날 아래 목숨을 바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함께 한 이시임(안나)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로 일생을 산 신앙인이었다.

충청도 내포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이름이 있던 덕산 고을의 높은뫼(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태어난 안나는 양반집 딸로서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안에서 덕산 인근에 널리 전파되어 가던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안나도 가족들을 따라 세속 일을 멀리하고 오로지 수계하는 데만 마음을 쏟게 되었다. 이후 그 집안은 유명한 성가정으로 교회사의 기록에 오르게 되었으니, 1827년에 모든 가족들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았으며, 특히 그의 4남매 중에서 큰오라비 이성지(요한)와 막내인 이유정(요한)이 전주에서 옥사로 순교한 때문이다.

성장해 가면서 안나는 양반집 딸로서는 실로 이루기 어렵다는 동정을 지켜 하느님께 순결을 바치려고 작정하였다. 물론 그의 이러한 결심은 얼마 안 되어 이웃과 친척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다른 가족들도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의 굳은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내 그는 신자들의 도움으로 몇몇 동정녀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장소를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기구한 운명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안나를 동정녀 공동체로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던 박이라는 교우 뱃사공이 세속의 유혹에 이끌려 배반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 뱃사공은 안나가 그에게 맡겨지자 강제로 결혼을 하였고, 안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비통함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예는 비일비재하였다.

아녀자의 몸으로 집을 떠난다는 것은 곧 남편이나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따라서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게 마련이었다. 또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외교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과부들의 예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안나는 종악이라는 아이를 낳았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죽음으로써 과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신앙에 의존하고 언제나 신자 본분을 충실히 지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경상도 산곡에 신자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 곳이 바로 진보 땅 머루산 교우촌이었다.

교우촌의 생활은 안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동정을 지키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은 나날의 신앙 생활로 씻을 수 있었고, 「박해를 받으면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는 이전보다 더 희망찬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그 날은 1815년의 부활 축일에 닥쳐왔다. 포졸들의 억센 손에 체포되어 안동 진영으로 압송된 후에도 안나는 교우들과 함께 서로를 격려해 가면서 형벌을 참아 받았다.

은총의 힘으로 다져진 안나는 최성열(바르바라)과 함께 서로를 북돋워 주었다. 오히려 그들은 감사에게『예수 마리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으며,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안나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얼마 안 되어 서울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안나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때는 1816년 11월 8일(양력 12월 26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