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지방시대 지방교회를 연다] 7. 대전교구

전대섭 기자
입력일 2012-02-16 수정일 2012-02-16 발행일 1997-08-10 제 206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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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년을 향하여…「선교」에 사활 걸었다
2천년 신자율 10% 목표 총력
미래사목 초석「교구법전」정비
공소활성화 등 당면과제 남아
『모든 것은 선교에』. 대전교구의 오늘은 이 한마디에 집약된다.

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표현대로 오는 98년 교구 설정 40주년을 앞두고「정중동(靜中動)」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대전교구는 그 준비단계의 열성과 깊이만큼이나 잠재적인 폭발력을 지니고 40주년과 2천년 대회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풍부한 유산

대전교구의 관할지역인 충남지방은 한국천주교회 신앙선조들의 자취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전 지역을 사목하고 있는 대전교구는 한마디로 풍부한 신앙유산을 물려받은 성지의 교구라 표현할 만 하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와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바로 이 지역에서 탄생했고 권상연ㆍ강완숙 등 초대 한국교회 신앙선조들의 삶의 무대였던「내포」지방(지금의 당진과 합덕, 예산, 홍성 등지)이 바로 대전교구의 땅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곳에는 어김없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또한 박해를 피해 성직자들이 숨을 돌리던 곳에는 유서 깊은 성당이 섰다.

국내 교구 가운데 성지가 가장 많은 교구인 것도 이러한 지역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866년 다블뤼 안 주교와 성직자 신자 등 10여 명이 순교한「갈매못 성지」,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솔뫼」, 1천여 명이 처형된「해미 순교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순교한「황새바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순교한 치명자들의 무덤이 있는「다락골 줄무덤」등 신앙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성지에는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전교구는 선조들에게서 물려 받은 이 같은 풍부한 신앙유산을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함으로써 값진 복음의 씨앗과 유산을 품고 있는 신앙의 큰 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교구 약사(略史)

대전교구는 1948년 서울교구에서 분리돼 독립된 포교지로 설정되었고, 그 책임자로 전 서울교구장이던 원형근(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가 임명됐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58년 6월 23일 교구 체제인 대전대목구로 설정돼 파리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된다.

62년 대전교구로 승격되면서 그 해 7월 24일 원형근 주교가 착좌식을 갖고 초대 대전교구장에 취임했다. 원 주교는 그러나 불과 2개월만에 은퇴, 한국인 교구장 주교 탄생의 계기를 만들었다.

3년 가까운 교구장 공석 기간을 거쳐 65년 4월 30일 당시 명동본당 주임이던 황민성 신부가 대전교구장에 임명돼, 그해 5월 30일 교구장 착좌식을 갖고 최초의 한국인 교구장 주교로서 제2대 대전교구장에 취임했다.

황 주교의 선종으로 84년 7월 당시 서울교구 보좌 주교이던 경갑룡 주교가 제3대 대전교구장에 임명돼 8월 29일 주교좌 대흥동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62년 교구 승격 당시 24개이던 본당이 96년 말 현재 81개로 4배 가까이 늘었고, 신자 수도 5만 명에 불과하던 것이 17만 명으로 늘어나 남 못지 않은 성장을 이룩했다.

이 외에도 교구 사제 수 1백50여 명에 교구 대신학교가 지난 94년 완공돼 현재 교구 신학생1백50여 명이 수학하고 있고 1개의 종합병원과 초ㆍ중ㆍ고 합해 9개의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명실공히 중부권의 대표적인 교회로서 발전을 이루어 왔다.

탈피를 위한 모색

대전교구가 문화적으로 신앙적으로 좋은 토양에 풍부한 신앙유산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되고 뿌리가 깊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역작용도 간과할 수 없다. 「안정」과「정착」은 곧 공동체간 끈끈한 유대와 결속을 가져 왔지만 그 이면에 외부의 것들을 터부시하고 인정치 않으려는 고지식한 자세로 비쳐지기도 했다.

대전교구의 어느 지역을 가나 구 교우가 많아 내 집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다 발전적이고 도전적인 사고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과의 연결이 용이하고 영ㆍ호남의 분기점으로서 외부의 자극을 적지 않게 받은 지역이면서도 전반적으로 성장세가 완만한 것이 이러한 요인들과 무관치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대전교구의 본당 수는 81개소로 서울 대구 광주 수원교구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신자 수 16만9천 명(96년 말 통계)은 사목구역 내 인구 수 대비 5.3%로서 전국의 신자율 7.8%에 뒤지고 있다.

농어촌 본당 수가 전체 본당의 70%로 안동교구에 이어 두 번째로 많고 공소 수 역시 1백51개로 전국 1위라는 핸디캡을 감안하더라도 그 잠재력과 가능성에 비추어 볼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전교구의 노력은「선교」라고 하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교구장 경갑룡 주교가 지난 95년부터 매년 사목교서를 통해 선교에 교구의 모든 역량을 총결집시켜 나가기로 한 것은 이런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경 주교는 지난 3년간「선교와 가정」(95년), 「선교와 성소 계발」(96년), 「예수 그리스도와 선교의 해」(97년)를 사목교서의 주제로 발표하면서 선교와 신앙 성숙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은 2천년 대희년을 앞두고 95년부터 향후 5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말하자면「선교」는 대전교구 사목의 첫 지침으로서 신자들을 한 광장으로 끌어내 공동의 유대로 묶고 미래를 향한 자기 탈피와 쇄신이라는 대장정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접근 가운데 하나가 지난 96년 7월에 개최된「선교 대토론회」다. 1년여동안 전 교구민을 대상으로 실시한「선교」와「냉담」에 관한 설문을 토대로 열린 토론회는 대전교구의 오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실상과 허상을 인식하고 미래를 조망해 보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됐다.

선교에 관한 문제들과 선교 활성화 방안들이 솔직하고 진지하게 논의됐다. 토론회 참석자들이 이 모임을『성령께서 이끄시는 교구의 새로운 성령강림이었다』고 표현한 데서 이 토론회가 갖는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조짐들은 교세 분석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징표 가운데 하나가 95년도 말 대전교구 신자 증가율이 4.4%로 전국 비율보다 1%를 앞선 것. 96년도 통계에서도 대전교구 신자 증가율은 전국치인 3.2%보다 무려 1.7%나 높은 4.9%를 기록했다. 전국 신자 증가율보다 해마다 0.2~0.3% 정도 밑돌았던 대전교구로선 모처럼 듣는 희소식인 셈이다.

그러나 96년도 말 현재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5.3%로서 전국 비율인 7.8%보다 2.5% 낮은 형편이다. 95년에도 이 같은 비율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단순통계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교분야에서 대전교구의 당면과제가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전교구는 따라서 오는 2천년까지 복음화율을 전국 비율까지 끌어올리는 데 최대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예상되는 2천년 전국 신자 비율은 10% 선. 지금보다 거의 곱절에 가까운 수치다.

대전교구는「교세 배가운동」을 위해 각 본당 신자 수의 10% 이상 영세 입교를 목표로 가정과 각 공동체마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대희년을 향하여

대전교구는 98년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는다. 현재 각 국별로, 혹은 각 단체별로 40주년 준비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지난 7월 17일엔 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4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바 있다. 전 세계 보편교회의 분수령이 될 2천년 대희년도 3년 앞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천년기를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 보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하는 대전교구의 지향은 한마디로「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교회」,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가는 교회」로 요약된다.

그 출발은『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가』라는 자문에서부터 시작된다. 40년간 이룬 발전에 안주하지 말자는 것이 또 다른 동인(動因)이기도 하다. 복음적 시각에서 오늘의 교구 모습을 가감없이 직시하고 대희년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방향 설정은 돼 있다. 세속화되고 인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줄 수 있는 교회,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있는 교회가 그것이다. 문제는「어떻게」에 달려 있다.

대전교구는 교구 신학교의 설립, 선교 대토론회 등 최근 몇 년동안 전개된 일들이 이러한 발걸음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교회가, 신자 스스로가 복음화 되지 않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됐다. 바로 그「어떻게」의 답 또한 여기에 있음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두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제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구법전」의 편찬이 그것이다. 일종의「교구 시노두스」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기존의 관행과 제도, 생활 등 교회의 구석구석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작업이다. 그간의 체험과 노하우가 총동원되고 그 대상은 교구청 직제에서부터 신자 개개인의 생활에까지 광범위하다.

그 과정은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해 왔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아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지역 사회 속의 교회와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찾자는 노력이기도 하다.

아울러 새로운 천년기를 앞둔 교회로서 새로운 사목적 대안 찾기와 미래사목의 초석을 놓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2천년에야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게 될 이 작업은「대전교구 2천년대 사목지침」으로서 힘찬 도약의 밑거름이 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대전교구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공소활성화와 농촌살리기 운동.

대전교구 내 공소는 1백51개소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95년부터 전국 최초로 공소지도자 학교를 개설한 것도 이러한 교구 의지를 반영한다. 40주년을 계기로 공소를 살리자는 운동은 더욱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농촌살리기도 공소활성화와 자연스럽게 맞물려 있다. 일찌감치 농축산물 직판장을 개설해 도농직거래를 정착시켰다. 이런 일련의 운동들은 앞으로 의지를 심고 정신을 바꾸는 정신개혁 운동 차원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교구 사목지표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청소년 신앙교육」문제. 본당에서, 가정에서 가능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개선해 나가는 데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 교구의 의지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대전교구의 행보와 그 결실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