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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15) 가경제~아편전쟁 전-가경제의 박해 (3)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16 수정일 2012-02-16 발행일 1997-08-10 제 206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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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고상 밟기 등 일본식 취조 영향 받아 감옥에서도 선교…많은 수인들 입교
교수ㆍ참수형, 노예 생활 등 갈수록 박해 더해
복자 오국성(베드로)은 귀주성 준의부 융평장에서 출생하여 작은 여관을 경영하였다. 여관에 투숙했던 교우가 선교를 하여 오국성은 입교를 하게 되었는데 집안에 모셔 놓은 사신 우상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1810년 준의에 교우가 6백여 명 되었으며 1810년 교난 때 오국성이 체포되었다. 오국성이 가족에게 보낸 서신 중에『나는 감옥에서 위안을 받고 있다.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 내가 만일에 감옥에서 죽으면 굉장한 기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형벌은 나의 죄를 보속해 주기 때문이다』이렇게 쓰고 있다.

신입 교우들은 차역에게 돈을 주고 석방되었다. 현관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배교의 표시로 십자고상을 밟게 하였다. 이런 취조 방식은 일본식으로 중국 박해가 옹정제 때 일본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오국성은 많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다. 오국성은 사형 당하는 날 휘광이에게『나에게 순교의 행복을 얻게 빨리 나의 목을 졸라 주시오』라면서 주머니에서 은전 2냥을 꺼내어 휘광이에게 주었다. 휘광이는 밧줄을 오국성의 목에 걸고 주번을 잡아 당기고 있다가 크게 징소리가 나자 밧줄을 세게 잡아당겨 오국성은 1814년 11월 7일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1815년 외교인 하나가 평소 천주교를 구시(仇視)하였는데 자기 집에 화재가 나자 그는 서양 신부가 교우들을 시켜 방화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그 지역에는 끄렛 신부 밖에 없었으므로 끄렛 신부가 체포되었다. 끄렛 신부는 호광 하남 등지에서 숨어서 사목을 하였는데 1815년 6월 6일 하남 김가항촌 교우 집에서 미사를 끝냈는데 차역들이 집을 포위하고 끄렛 신부를 쇠사슬에 묶어 관청으로 압송하였다.

나쁜 교우가 돈 20냥이 탐이 나서 끄렛 신부를 밀고한 것이었다.

끄렛 신부를 농 속에 가두어 20여 일 여정이나 되는 무창으로 압송하였다. 끄렛 신부한테서 궁중에 통역관으로 있는 라미오트 신부의 서신이 나와 라미오트 신부도 체포되고 정복사에 있던 신부들도 체포되었다. 정복사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라미오트 신부는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라자리스트회 중국인 심 프란체스코 신부는 충군되고 끄렛 신부는 심 프란체스코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았다.

라미오트 신부가 새 옷을 사서 끄렛 신부에게 주자 끄렛 신부는 새 옷을 사양하고 헌 옷을 입고 사형장으로 갔다. 사형장은 무창 서문 외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수 치명하였으며 시신은 홍산에 매장하였다.

전국적인 교난이 만연하여 1815년 뒤프레쎄 주교가 체포되어 성도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동년 중국인 유 시몬 신부와 왕 바오로 신부가 체포되어 8년간이나 감금되었다가 유 시몬 신부는 이리로 충군되어 20년간 노예생활을 하였다. 프란체스코회 복자 트리오라 신부는 호남 대리주교인데 호남 장사에서 1816년 2월 7일 교수 치명하였다.

복자 조영(아우구스띠노) 신부는 원래 성이 주씨 였다. 조영 신부는 무천현의 차역이었다. 무천은 사천의 팽수현과 인접해 있다. 1772년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매 신부도 감옥에 갇혔는데 감옥에서 열심히 선교하여 수인들 중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조영이 이때 감옥에 차역이었는데 매 신부의 강론을 듣고 감화를 받아 매 신부가 출옥되자 매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집안에 여러가지 신상을 파괴하였다.

조영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는 것을 보고 조영을 사제가 되게 하고 서품을 줄 때 성을 조씨로 바꾸어 주었다.

조영 신부는 운남성 산악지대에서 사목을 하였는데 주교의 명을 받고 천유, 관현, 금당, 온강 3현에서 열심히 사목하였다. 그는 특히 고해성사를 열심히 주었다고 한다.

조 신부는 넓은 지역을 도보로 걸어 다니며 사목을 하여 몸이 많이 쇠약해진 데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조 신부는 감옥에서도 선교를 하였는데 차역이 조 신부의 입을 80판 때렸다고 한다. 조 신부는 1815년 1월 27일 옥사하였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