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40) 다시 ‘내가’인가 ‘나는’인가

성찬경(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2-15 수정일 2012-02-15 발행일 2012-02-19 제 278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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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사람 거쳐 번역된 성경 예수님과 걸맞은 표현으로 바뀌어야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이런 경우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런 경우 두 가지가 있다. 요컨대 ‘내가 말한다’와 ‘나는 말한다’ 의 두 경우가 있는데, ‘내가’로 시작될 때에는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겨져서 나의 마음이 편치가 못하다.

‘내가 말한다’와 ‘나는 말한다’의 사용빈도가 어떻게 분포돼 있는 가를 알기 위해 2005년에 간행된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를 살펴보았더니 이 복음서 안에서 ‘내가 말한다’가 43회 나오고, ‘나는 말한다’가 9회,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가 1회 나온다. 직접 번역을 담당하신 분이 얼마나 ‘나는’보다 ‘내가’를 선호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남보다 더 집착하는 것은 나도 「성경」의 번역사업에 윤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 한 사람의 책임이 그렇게 클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아주 없지도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와 ‘나는’이 어떻게 다른가를 내 나름대로 설명할까 한다. 나는 문법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평생 시를 써온 사람으로서, 우리말의 뜻의 낌새나 적절한 표현 여부에 대한 판단과 느낌은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해서 말을 하려는 것이다.

먼저 여러 사람 앞에서 ‘누가 마당을 청소하였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마당을 청소한 사람은 나서서 ‘내가 했다’고 말해야 하며 ‘나는 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말의 어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를 사용하는 또 하나의 경우는 ‘적진에 누가 척후병으로 갈 것인가’ 묻는 경우 모두들 ‘나는 못가겠다’고 말하는데 (이런 땐 물론 ‘내가 못가겠다’고 말하면 안 된다) 어떤 이가 그 임무를 지원하고 나선다면 ‘내가 가겠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내가’에는 ‘배타적 특정인’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다.

또 ‘내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해서 쓸 수는 있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쓰기는 불편하다. 특히 누군가가 ‘내가 말한다’ 할 때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말을 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의 뜻이 포함된다. ‘내가 말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권위를 암암리에 풍기는 말투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나는 말한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는데, 어떤 모임에서 자기 소개를 하게 됐을 때에는 당연히 ‘나는(저는) 아무개입니다’ 해야지 ‘내가 아무개입니다’ 한다면, 여러분 그 사람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는 뜻으로 들려 결례가 된다. 따라서 서로 모를 때 자기 소개를 하려면 의당 ‘나는’ 이라야 한다. 그리고 ‘나는…’에는 또 두 가지의 뜻이 포함돼 있다. ‘여러분은 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는 뜻과 ‘여러분과 나는 같은 사람입니다’ 하는 평등 사상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나는’ 은 특별한 조건이 없을 때에도 쓸 수 있는 말이지만 ‘내가’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은 여러 사람에게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돌아다니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히려 예수님의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고압적인 말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진실로 말한다’보다는 ‘나는 진실로 말합니다’ 쪽이 백번 더 예수님과 어울린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말한다’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거의 오류성(誤謬性)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성경」의 번역은 오랜 시간에 걸친 여러 사람의 정성이 쌓여서 완벽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업일 수밖에 없겠다. 생각나는 분명한 의견이 있는데 침묵하는 것도 신자의 도리는 아니리라 싶어 전에 꺼낸 적이 있는 문제를 재론하는 바이다.

성찬경(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