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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마산교구 완월동본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2012-02-19 제 278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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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세월 넘게 원형 유지
문화재로도 보존 가치 높아
한국교회 초기, 교회 안팎으로 어려운 여건 안에서도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역에서는 교우촌이 활발히 꾸려졌다. 이에 비해 남부지역의 복음화는 다소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를 뒤흔든 박해가 전국 각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힘을 더했다.

끔찍한 박해가 지속되자 수많은 신자들이 고향을 등지고 피신해야 했다. 이러한 신자들의 이주에 힘입어 남부지방 곳곳, 바닷가 지역은 물론 섬지역에도 교회의 가르침이 속속 스며들기 시작했다. 1872년 발발한 정해박해는 호남지역 복음화의 근간을 무너뜨린 대표적인 박해였다. 이로 인해 호남지역 신자들은 하나 둘 경남 서부지방으로 피신했다. 험난한 지리산과 덕유산을 가로질러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신앙과 삶에 대한 열정은 신자들의 발길을 남쪽으로 이끌었다.

특히 1890년대 들어서 남해안 주요 항구가 문을 열면서, 남부지역 선교활동은 더욱 활발히 이어질 수 있었다. 1900년, 드디어 마산에도 첫 본당이 문을 열었다. 마산지역 최초로 설립된 마산본당(현 완월동본당)은 교구의 맏형으로서 지금까지도 교구 복음화의 뿌리를 튼튼히 지켜오고 있다.

경남지역 내에서 본당이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부산이다. 이후 새로운 본당 설립지를 물색하던 선교 사제들의 시선이 머문 곳은 진주였다. 1890년대 진주는 관찰사가 거주하는 경남의 중심도시로 본당 설립을 위한 이점이 많았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신, 선교의 한계 상황 등이 지속되면서 본당은 마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국에 들어온 후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전교해오던 에밀 타케 (Emile-Joseph Taquet,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영·호남 일대를 사목하면서 눈여겨본 범골 산자락(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자리를 잡았다. 마산 완월동본당(주임 김길상 신부)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완월동본당이 1975년까지 사용했던 성요셉성당. 성요셉성당은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한국 근대 건축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방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어 있다.
1898년 개항한 마산은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적어 선교활동에 숨통을 틀 수 있었다. 타케 신부는 경남지역 최초의 신자인 김 달시시오의 집에서 거처하며 초가집을 임시성당으로 꾸몄다. 이어 1900년 6월 29일 드디어 마산본당(현 완월동본당)이 본격적으로 본당으로서의 사목 활동에 돌입한다. 당시 성당이 자리잡은 범골은 가옥만 몇 채 있을 뿐 황무지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복음화의 열정을 키우는 데에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타케 신부가 지역 선교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당시 신자 수는 1,054명, 예비신자만도 393명으로 늘었다. 1902년에는 본당 첫 견진성사도 거행됐고, 1094년에는 기와성당과 사제관도 신축했다.

당시 전국 대부분의 본당들은 일제에 맞서 민중계몽은 물론 각종 교육사업의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무세(Jean Germain Mousset) 신부도 한일합방 이후 교육사업과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절감, 성당 내에 초등교육기관인 사립 성지학교를 열었다.

1920년대 이후 마산지역 냉담신자들이 성당을 다시 찾는 사례 또한 급속히 늘었다. 더불어 본당은 새 성당 건축과 마산청년회 창립 등을 추진, 사목 활성화를 이끌어나갔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교육 지원에 더욱 힘을 실어 1935년에는 성지학교를 개축, 중등교육기관인 성지 강습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학교는 일제 탄압으로 한때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1949년 성지여자중학교로 재출발, 고등학교까지 병설해 가톨릭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본당은 이 시기 활발한 복음화에 힘입어 옥포본당에 이어 함안과 거제본당 등을 분리, 신설하며 교세 확장을 뒷받침했다.

4대 주임인 율리오 베르몽(J. Bermond) 신부는 29년 여의 오랜 기간 동안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면서 본당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1928년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을 절충해 지은 석조 ‘성요셉성당’을 선보이며, 지역사회에 가톨릭교회의 존재를 더욱 폭넓게 알렸다.

성요셉성당의 종.
당시 신자들은 3년여에 걸쳐 두께 40cm가량의 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성당을 지었다.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쌓아올린 터라 외벽이 울퉁불퉁했지만, 이러한 형태가 입체감을 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건립 초기 성당 주변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어 무학산의 전경과 어우러진 성당의 자태는 더욱 빼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애물이 없어 성당 종소리 또한 꽤 먼 곳까지 울려 퍼지며 지역민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현재까지 성지여자중고등학교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성요셉성당은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한국 근대 건축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지난 2000년 성당을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283호로 지정했다.

하지만 신자 수가 급격히 늘면서 본당은 지난 1975년 새 성당을 지어 이전했고, ‘성요셉성당’은 현재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신앙생활 공간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본당은 지난 2000년 대희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상 복음화에 더욱 힘쓸 뜻을 다짐하고 내·외적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요셉성당 내부 모습.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