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47 김시우(알렉시오)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1997-07-27 제 206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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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불수 몸으로 굳건히 신앙 지켜
올해박해 때 경상도 지방에서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 충청도 내포 출신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내포지역의 신자들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고향을 떠나 경상도 산곡으로 이주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신앙생활의 자유를 찾으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비록 신유년에는 박해가 그들을 피해 갔을지라도 새로운 박해가 다시 한 번 그대로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고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김시우(알렉시오) 또한 충청도 청양 고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훗날 경상도로 이주한 신자였다. 본래 성품이 착하고 어진 데다가 재능과 학식이 있었지만,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여서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입교한 뒤에는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스스로 교리를 충실히 익혀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으며, 가난 때문에 혼인할 수 없음을 전혀 탓하지 않았다.

그 후 알렉시오는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사는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시사를 받아 생명을 유지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간간이 왼손으로 교회 서적들을 필사하여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따라서 다른 교우들이 알지 못하는 교리를 많이 알게 되었다. 또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외교인들을 성교회로 인도하였다. 그러다가 교우들을 따라 경상도 진보 땅에 있는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었고, 언제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았다.

1815년 2월 22일 부활 축일에 이르러 노래산 교우촌이 포졸들에게 습격당한 데 이어 모래산 교우촌이 습격을 받게 되었으나, 포졸들은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시오는 소리내어 울면서「자신이 병신이므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체포하지 않는다」고 탓하였고, 이를 알게 된 포졸들이 그 청을 들어주자 기쁜 낯으로 동료들을 따라 나섰다.

안동 진영으로 압송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그럴 때마다 이미 배운 교리를 어길 수 없으므로 죽음에 이를지라도 배교할 수 없다고 답하였고, 창조주의 존재와 강생ㆍ구속의 도리, 상선벌악의 이치를 박해자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항구한 마음에 관원들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이어 대구로 압송된 그는 감영에서도 전혀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다음과 같이 감사를 입교시키려고 할 정도였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한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매에 죽은 그를 흠숭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다른 사람들에게 매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라의 우 입금님은 9년동안 장마가 지자 나라를 두루 다니시며 백성들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궁궐 앞을 지나치면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 임금님께서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 임금님처럼 물질적으로 백성을 구한 것이 아니라 만방의 영혼을 구하려고 하시다가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감사님께서도 예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며 천주교로 들어 오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알렉시오는 다시 한 번 죽음에 이를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말문이 막힌 데 화가 나서 그의 턱을 부수어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고, 알렉시오는 이제 순교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당시 옥중에서는 죄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러면 죄인들은 짚신을 삼아 이를 보상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알렉시오는 다른 죄인들처럼 짚신을 삼을 수 없었으므로 음식을 얻어 먹지 못하였다.

이제 형벌로 쇠약해진 데다가 굶주림까지 겹친 알렉시오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대구로 이송된 지 두 달 가량이 지나 옥중에서 숨을 거두니, 그 때가 1815년 6월경으로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굳건했던 그의 신앙심, 동정과 재능, 박해자들의 앞에서 그리스도를 변호한 용기는 오랫동안 교우들의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