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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13) 가경제~아편전쟁 전-가경제의 박해 (1)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1997-07-13 제 206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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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교 일파”로 오해……수없이 무고 당해
선교지역 표시한 지도 발각돼 박해 가중
건륭제는 재위 61년간 천주교 박해를 잠시도 멈춘 일이 없었다. 가경제부터 국세는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가경제는 등극하기 전에 서양 선교사들과 잘 지내지 않아 서양 학문이나 서양 예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경제가 등극한 후에 교회는 잠시 숨을 돌리는 듯 했다.

사천대목구 두프레쎄 주교는 1803년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신부들을 소집하여 회의까지 했다. 1804년 변방에 충군 되었던 교우들이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들은 잠시 외면적인 완화 상태였다. 모든 황제들이 등극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한 수법에 지나지 않았다. 이태리 프란치스코 선교사들은 산서성과 섬서성에 숨어 조심스럽게 선교를 했다.

가경제는 처음에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에서 숨어서 선교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가경 10년(1805년) 백련교의 난 후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하는 것이 폭로되어 천주교를 더 엄금하게 되었다. 가경제 때 체포되어 처벌을 받은 교우가 약 1천여 명 된다.

명 말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가서부터 천주교를 구시하던 사람들은 천주교를 늘 백련교의 일파라고 무고하여 박해도 많이 받았고 천주교가 수없이 궁지에 빠지기도 했다.

백련교는 남송 때 모자원에 의해 창설된 백련종에서 기원하며 중국 민중 반란의 정신적 조직적 중심 지주가 되어 왔다. 백련교는 반 체계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명나라 때도 민중 반란의 주류가 되어 왔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무군무주 사상을 덧붙혀 무정부적인 유토피아 사상을 주장하는 위험한 종교로 발전하였다. 특히 가경제 때 크게 반란을 일으켜 지주 계급과 청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청조의 재정을 만회하기 힘들게까지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3세는 17세기 말 중국을 3개 교구 9개 대목구로 설정하고 지역마다 포교를 담당할 선교 단체를 정하였다.

호북성 섬서성은 프란치스코회, 복건성 운남성 사천성은 파리외방전교회, 절강성은 도미니코회, 귀주성 산서성은 예수회, 강서성은 아우구스띠노회가 담당하였으나 후에 전교 구역이 변경되기도 했다.

교난이 자주 발생하여 3개 교구 9개 대목구라 하여도 주교가 출결되어 대리인이 하거나 공석일 때가 허다하였으며 로마 교황청과 연락도 안 되었다. 1800년엔 서양 신부가 50~60명 중국 신부가 80여 명 되었으며 교우가 30만 정도 되었다. 북경교구 주교가 남경교구 교무까지 맡았던 이유는 궁중에서 공직 때문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또 박해 중에 남경에 내려가 교무를 집행할 수 없었다.

◎ 지도사건

흠천감에서 공직하는 피레스 신부가 남경 주교로 임명된 공문이 마카오에 도착되자 포르투갈 선교사가 중국인 교우 진요왕에게 부탁하여 북경에 가져가게 하였다.

1804년 9월 진요왕은 공문을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에게 전달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본국과 마카오로 보내는 서신 2통과 지도를 받아 휴대하고 마카오로 가다가 체포됐는데 짐 조사에서 서신과 지도가 나와 발각되었다.

북경에서 공직하는 서양 선교사들은 정부의 허락 없이 외부와의 어떤 연락도 할 수 없으며 특히 본국과의 서신 연락은 검열을 받아야 되었다. 강서 순무 진승은은 진요왕을 심문하고 1805년 2월 9일 이 사건을 조정에 보고하고 지도를 북경에 보내어 지도가 황제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편지는 포르투갈어와 이태리어로 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아우구스띠노회 아데오데 신부가 그린 것인데 직예성 광평부 곡부에서 경주에 이르는 전교지역의 지도였다.

아데오데 신부를 체포하여 여러 차례 심문하고 진요왕은 북경으로 압송하였다.

중국에서 영국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정부에서 긴장하고 있는데 지도가 발견되었으므로 영국 군함에 이미 그 지도를 보낸 것으로 알고 놀랐던 것이다. 교우들도 체포하였는데 배교한 사람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중국에서 영국 세력이 점점 확대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졌다. 피레스 주교는 북경에서 흠천감 산학관 일을 하면서 남경교구 교무를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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