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46 최성열(바르바라)

차기진·한국 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1997-07-13 제 206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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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배교 강요 불구 끝까지 순교
신유박해 이후 교우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들이 정착한 곳은 전혀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산간지대의 척박한 골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은 근면하게 생활하여 몇 해 안에 주변지역을 옥토로 가꾸어 나갔고, 그러면서 새로운 교우들이 새 터전에 모여들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전라도 북부의 산간지대, 충청도와 경기도의 내륙지역, 경상도와 강원도 접경의 고지대에 이처럼 비밀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같은 시기였다.

물론 교우촌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만을 위해 힘 쓴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뒤에는 남모르게 교회 지도자들의 활동을 돕거나 열심히 인근에 복음을 전하였다. 충청도 홍주 땅의 한내장벌(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최성열 (바르바라)도 바로 이러한 교우촌에서 신앙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일찍이 내포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바르바라는 첫 남편을 잃은 뒤, 열심한 교우로 이름이 있던 서석봉(안드레아)과 재혼하였다. 이후 집안을 성가정으로 구미는 데 열중하던 그들 부부는 신유박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는 신앙 생활을 위해 경상도 땅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부랴부랴 고향을 떠난 탓에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겨우 등에 질 수 있는 물건들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부가 합심하여 척박한 땅을 개간한 결과 몇 해 안에 먹고 살 만한 재산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들 부부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청송 노래산(청송군 안덕면 노래동)이란 교우촌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식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곤궁한 이들에게 애긍을 베풀며 생활하였다. 또 열심한 교우로 이름이 있던 최봉한(프란치스코)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당시 노래산의 교우들은 축일을 맞이하게 되면 인근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 축일 행사를 갖곤 하였다. 그러던 중 이 교우촌이 뜻하지 않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전지수라는 배교자의 밀고 때문이었다. 이 배교자는 1814년에 큰 가뭄이 들자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였는데, 더 이상 애긍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그들을 밀고함으로써 재산을 탈취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그는 1815년 2월 22일 부활 대 축일을 지내기 위해 교우들이 노래산에 모여 있을 때, 포졸들과 함께 들이닥쳐 이들을 모두 체포한 뒤 경주로 압송하였다. 을해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바르바라와 안드레아 부부는 곧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여러 날을 번갈아 가면서 형벌을 받는 가운데 몇몇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그들 부부는 모든 것을 참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만 갔고, 그만큼 마음도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위 최봉한(프란치스코)은 그들 부부를 돌보아 주면서 함께 천주님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이에 바르바라 부부는 다시 힘을 얻고 온갖 가혹한 형벌을 이겨낸 뒤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의 형벌은 더욱 가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은총의 힘으로 다져진 그들의 마음은 어떤 유혹도 뿌리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안드레아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바르바라는 오히려 슬픔 대신 더 큰 용기를 얻고, 자신도 남편이 얻은 찬란한 상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에게는 다음과 같이 순교의 각오를 드러내곤 하였다. 「예수 마리아께서 저를 부르시면서 함께 천국으로 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서울로부터 사형 판결이 내려오자, 감사는 옥중에 있던 바르바라를 다른 교우들과 함께 끌어내 형장으로 데려 가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형리들이 한 명씩 사형을 집행하였으니, 때는 1816년 11월 8일(양력 12월 26일)로, 바르바라의 나이 40세였다. 순교한 다음해 3월 2일,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다른 곳에 이장할 수 있었다. 이때 짐승들이 바르바라의 시신 일부를 파 먹은 듯 하였지만, 몇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옷과 나머지 시신이 온전하여 모두가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바르바라의 시신을 옮겨 묻었다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차기진·한국 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