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민족화해학교 제2단계 지상중계 7

입력일 2012-02-10 수정일 2012-02-10 발행일 1997-05-18 제 2053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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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조선족의 생활 실태와 문제점-김연수 대구대 교수

피땀으로 일군 130년 이주 역사

비정치적ㆍ정신적ㆍ농민적 심성 지녀 재소(在蘇) 한인들 남북한 감시자 역할도

러시아 조선족 130년사는 이국으로의 이주라는 사실이 증명해 주듯이 피와 땀의 역사였다.

현재 구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분포 현황은 79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서 38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14만7천 명, 러시아 10만여 명, 카자흐스탄 8만1천 명 기타 지역에 2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일들의 소련 이주는 조선 철종 12년(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생활고에 못 이겨 함경북도에 거주하던 한국 농부들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영토인 블라디보스톡 및 남부 우수리 지역에 여름에 건너가 농사를 짓고 가을에 귀환하는 농부 내지 품팔이꾼으로 살면서 러시아 이주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한인들의 수난 원인은 전 러시아 황제의 지지를 받던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 혁명에 의하여 타도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소련 침략에 불안을 느낀 스탈린은 극동에서의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키로 결정하고 1937년 시베리아 연해주에 사는 약 18만여 명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특히 구 소련은 극동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지만 더욱이 법으로도 극동지역으로의 재이주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한인들은 우선 정착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고 다행이 우수한 농사법을 이용, 고려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재소 한인들은 크게 3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비정치적이며 정신문화적, 농민적인 심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재소 교포들은 그들의 조국인 한반도문제 해결에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한민족의 정치에 대해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고 두번째는 남북한 정부에 대해 반민족적 정치를 못하도록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재소 한인들이 당당한 민족 단체로 성립이 돼 있을 때 남북한 정부에 대해 확고부동한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모국의 정치 현황이 평화적이고 정당한 지 감시하는 대민족 단체로서 존재될 것이다.

◆통일 독일의 국민 통합이 주는 교훈-남현욱 세종대 교수

‘꾸준한 만남’ 통일의 출발점

교회, 동-서독 잇는 교량 역할 내적 통합 위한 정치교육 필요

통일 독일은 통일 직후 손에 손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동포애를 만끽하고 지냈지만 통일 후 1년이 지나면서 이해 상충과 경쟁 심화, 불신, 적대적 시기심, 상호 경멸 등으로 마음의 장벽을 쌓아갔다.

그러한 원인으로써 실업 불안과 서투른 소비생활과 법률생활, 차별감, 상대적 박탈감, 성급하고 과도한 기대와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허탈감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물질중심적 통일 출발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장벽이 무너졌던 시기에 동독인을 정말 돕겠다는 서독인의 의지를 정치가들이 유기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내적 통합을 위한 정치교육이 필요하며 특히 상이한 출신 배경,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상호 이해, 평화로운 공생 능력과 자세 배양, 공동의 민주주의 정치문화 토대 구축을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통일 독일은 따라서 내적 통일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면서「나눔으로써 나누어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과「우리 문제-다같이 손해 보거나 다같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기본 자세를 설정해 나갔다. 아울러 진정한 경제적 통합을 위해 연방 재정 균형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교회는 분단 40년간 동서독을 잇는 고리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으며 동독교회는 동독의 민주화운동의 요람으로 인정받아 왔다.

가톨릭 까리따스와 개신교에서는 통일 전까지 약 340억 마르크를 지원했으며 동독의 마지막 수상이였던 드 메지에르는「교회는 정치적 반대 세력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했다고 역설한 바 있을 정도로 교회의 역할은 막중했다.

교회는 아직도 주민의 진정한 통합, 신설 5개 주 주민의 자의식 고양, 눈에 안 보이는 장벽 제거, 학교 및 복지기관의 설립과 유지 등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 통일의 예를 통해 통일이 늦을수록 더 많은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가 화합과 일치의 가장 필수적인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