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예수님과 사도들과의 동행’ - 제4차 정통 크루즈 성지순례 (1) 터키

터키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1-11-02 수정일 2011-11-02 발행일 2011-11-06 제 276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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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대성당 신비한 건축술
아름다운 벽화에 찬사 터져나와
‘떼라 쌍타(Terra Sancta)’ 라틴어로 ‘성스러운 땅’, ‘성지(聖地)’를 뜻한다. 성지 중의 성지는 단연 예수님이 이 땅에 와 계시는 동안 당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며 그 다음을 꼽는다면 박해를 받거나 순교를 당하기까지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전한 제자들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를 예수의 가장 큰 제자로 여긴다.

가톨릭신문사가 주최하는 제4차 ‘정통 크루즈 성지순례’는 10월 7일부터 18일까지 11박12일에 걸쳐 터키, 이스라엘, 그리스 3개국을 순례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를, 터키와 그리스에는 바오로와 예수님의 십자가상 말씀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모신 사도 요한을 만날 수 있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 24) 성지순례를 하며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떠올랐던 성경구절이다. 순례 기간 동안 찾았던 모든 곳은 성경의 ‘현장’이어서였을까. 성경을 넘기며 읽었던 혹은 미사 강론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듯이 느껴졌다.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순례 첫날 찾은 곳은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순례객들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11시간30분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2800년의 역사를 지닌다는 곳으로 아테네, 로마와 함께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다. 이스탄불로 불리기 전에는 콘스탄티노플(330~1453년), 그 이전에는 비잔티움이라고 했다. 도시 이름에서 풍기듯이 이스탄불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문화가 공존하며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전 세계 순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시차적응이 덜 된 순례객들은 순례 첫 날인 10월 8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의해 지붕이 있는 건축물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고 선정된 성 소피아대성당을 찾았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틴 예술의 극치이며 교회사적으로는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 개최된 기념비적인 장소다. 성 소피아대성당과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은 지 400년 된 이슬람 사원의 대표작 ‘블루 모스크’가 마주보고 서 있다.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대성당은 언뜻 보기에 외형이 비슷하다. 블루 모스크를 처음 보는 순례객들은 성 소피아대성당으로 착각하곤 한다.

‘미나렛’이라 불리는 가늘고 높다란 첨탑과 중앙의 둥근 지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미나렛은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곳이다. 6세기에 건립된 성 소피아대성당은 1453년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는 과정에서 미나렛이 올려지고 내부 대부분의 성화들이 회칠로 덮여지고 말았다.

성 소피아대성당 안으로 들어간 순례객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둥 하나 없이 거대한 구조물이 지탱되고 있는 신비한 건축술과 군데군데 남아 있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사도들을 표현한 벽화들의 아름다움에 눈은 휘둥그레지고 찬사가 터져 나왔다. “솔로몬이시여 당신을 뛰어넘었습니다.” 537년 성 소피아대성당을 완공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잔틴 예술의 극치라 불리는 이스탄불 성 소피아대성당 전경. 원형이 변형돼 이슬람사원 양식이 혼합돼 있다.
마리아 모셨던 성모님의 집

이스라엘과 그리스 성지를 찾은 순례객들은 10월 15일 다시 터키 쿠사다시항에서 내려 버스로 30분 거리의 에페소 ‘성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당하지 않은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마지막까지 모셨다고 전해지는 곳.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경당으로 사용됐고 현재는 1951년 복원된 모습이다. 성모님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우리나라 국립공원처럼 고즈넉하고 길 양옆으로는 나무가 울창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성모님의 집은 2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규모로 두 개의 장궤틀이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누구나 바닥에 무릎부터 꿇고 기도를 올린다. 이상하게도 성모 마리아의 양 손이 없다. 에페소 고대 유적 발굴 과정에서 양손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모상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봉헌한 초와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봉헌한 성작이 놓여 있고 경배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봉헌한 묵주가 보인다. 성모님의 집 내부는 촬영이 엄격히 금지돼 무장 군인과 관리자가 건물 안팎을 지키고 있지만 출구에 붙어서서 가까스로 성모상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에페소 성모님의 집 전경.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말씀에 따라 성모님을 모시고 산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1951년 복원된 모습이다.
에페소 성모님의 집 성모상. 내부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어렵게 촬영할 수 있었다.
에페소 성모님의 집 야외에서 봉헌된 순례객 미사 장면.
사도 요한 성당 방문

성모님의 집 순례를 마치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시아 최대 규모로 건립했던 ‘사도 요한 성당’을 찾았다. 지금은 돌기둥과 건물 일부만 남아 있어 규모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진으로 붕괴됐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이민족의 침입으로 부셔졌다고도 한다. 전통적 비잔틴 양식인 십자가 교차 형태의 성당이며 교차 지점에 100년 경 선종한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다고 추정된다. 사도 요한 성당에서 내려다보면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크기였다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 한 개만이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 요한 성당을 지을 때 아르테미스 신전 기둥을 옮겨다 사용했다고 한다.

사도 요한 성당에서 고대 에페소 유적까지는 가까운 거리여서 걸어서 이동했다. 항구도시로 번성했던 고대 에페소의 영화를 짐작하게 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조각들이 즐비해 작은 대리석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곳은 켈수스 도서관이었다. 바오로가 제자들과 함께 토론을 벌였다는 사도행전 19장 9절의 티란노스 학원 터에 세워진 도서관으로 그곳에서 ‘지식 소매상’들이 돈을 받고 세상 지식을 팔 때 바오로는 돈을 받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431년 에페소공의회가 열렸던 에페소 성모성당도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16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에페소에서 크루즈 선박 ‘비전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온 순례객들은 10월 17일 다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복자 교황 요한 23세가 교황이 되기 전 머물렀던 이스탄불 주재 교황대사관 옆 성령성당에서 파견 미사를 드린 후 정교회 총대주교좌성당, 비잔틴 미술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코라성당 박물관의 성화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시간의 부족을 탓해야 했다.

터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