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창간 4주년 특집] ‘시각중복장애인 보금자리’ 여주 라파엘의 집을 찾다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10-25 수정일 2011-10-25 발행일 2011-10-30 제 276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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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밝은 마음으로 세상 치유하는 천사들
밴드·사물놀이팀 활동하며 세상 모든 이에게 희망 선사
각종 공예·컴퓨터 등 배우며 사회와 소통할 ‘꿈’ 키워가
사물놀이팀 ‘소리친구’의 노장 안드레아씨가 신명나는 가락으로 풍물을 선보이고 있다. ‘소리친구’는 장애라는 편견을 버리고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2002년 창단됐다.
치유의 천사 라파엘은 20년 전 경기도 여주를 찾았다.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 시각장애도 모지라 적게는 한 개, 많게는 대여섯 개의 장애를 가진 ‘시각중복장애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다.

천사 라파엘이 찾아든 수원교구 여주 라파엘의 집(원장 정지훈)이 어느덧 창립 20주년이 됐다. 라파엘의 축일을 9일 앞둔 9월 20일, 여주 라파엘의 집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라파엘들’을 만났다.

■ 라파엘 밴드의 희망 변주곡

여주 라파엘의 집의 자랑, 라파엘 밴드가 경쾌한 가락에 맞춰 연주를 하고 있다. 이들은 공연을 통해 다른 이에게도 작은 희망을 선사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연주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나에게 가는 길, 오도가도 못 하는 길, 무거운 구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버리고 떠나가자, 뒤돌아보지 말고. 고장난 자동차, 요란한 네 바퀴 인생. 귀신에 쫓기듯 달려왔던 옛 이야기, 버리고 떠나가자, 뒤돌아보지 말고.”

여주 라파엘의 집의 자랑, 라파엘 밴드가 노래한다. 드럼을 맡은 상배(요한)씨의 드럼스틱이 공중에서 네 번 부딪치더니 4분의 4박자 신나는 곡, 윤도현의 ‘오늘은’이 흘러나왔다. 건반 3대와 드럼, 기타 2대, 그리고 마이크. 조촐한 밴드의 열띤 공연이다.

“나 이제 떠나갈래, 한 조각 구름처럼. 꿈을 만들 수만 있다면 혼자라도 좋아. 나 이제 떠나갈래, 흐르는 강물처럼 잠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 함께라도 좋아. 언제라도 좋아.”

라파엘 밴드의 노장 안드레아씨의 고개가 박자에 맞춰 경쾌하게 흔들거린다. 경미언니로 불리는 경미씨의 볼은 부끄러워 발그레해졌지만, 손가락은 건반 위를 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누구보다 밝은 귀를 가진 그들은 음악에 ‘희망’을 실어냈다.

2004년 11월 첫 연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일이다.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돼 희망을 전했지만 연주 때마다 마지막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나이와 성별은 저마다 다른 이들이지만, 매주 3일을 꼬박 만나 연습하며 끈끈하게 만든 우정이다. 라파엘 밴드의 순재씨가 말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저희 꿈이에요. 장애인이지만 공연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 많이 신나게 공연하고 싶어요.”

2002년 만들어진 사물놀이팀 ‘소리친구’도 라파엘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환영의 인사를 보냈다. 장애라는 편견을 버리고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창단된 사물놀이팀‘소리친구’. 이들은 농부들이 두렛일을 하며 흥을 돋울 때 연주하는 웃다리풍물을 선보였다. ‘얼쑤’와 ‘좋다’를 반복하며, 상쇠와 연신 꽹과리를 주고받는 모습이 웬만한 농악대가 부럽지 않다.

중복장애로 인해 활동할 수 있는 이들이 적어 밴드단원 몇몇이 사물놀이도 함께 하지만, 드럼과 대북을 함께 두드리며, 마이크와 꽹과리를 함께 잡으며 신나게 논다. 보이지 않기에 더 밝은 귀를 가졌고, 그 밝은 귀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라파엘 밴드와 소리친구는 그렇게 마음으로 노래하고,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 마음과 마음 만나는 곳

만 8세부터 65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라파엘의 집에서는 직업재활도 이뤄지고 있었다. 구슬공예와 도자기공예, 컴퓨터교육, 비누공예, 위탁 작업 등. 그마저도 어려워하는 중복장애인들에게는 일상생활의 소통을 할 수 있게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도와준다.

별관에 위치한 시각·청각재활실은 라파엘의 집이 꾸는 ‘꿈’이다. 눈과 귀가 모두 불편한 중복장애인들에게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고 들을 수마저 없는 그들, 라파엘의 집에는 시각청각중복장애인 10명이 살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 손바닥에 ‘안녕’이라는 글자와 함께 이름을 쓴다. 시각청각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고입검정고시까지 마친 훌륭한 학생이다. 그도 손바닥에 ‘안녕’이라고 쓴다. 마음과 마음이 닿았다.

여주 라파엘의 집 정지훈 원장은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며 “한국의 헬렌 켈러 탄생을 위해 힘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성자(로사)씨를 만났다. 다른 장애인들과 매일 오후 7시면 기도모임을 꾸릴 정도로 신앙심 깊은 할머니다. 2009년부터는 연도도 시작했다. ‘장애인들은 도움 받는 것에만 익숙하다’는 편견을 버리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도팀이다. 시각 장애로 인해 글자를 읽기 힘들다보니 연도책을 아예 통째로 외워버렸다. 이제는 인근 상갓집을 찾아가 연도를 주고받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별관을 방문한 황진수(마티아·생활지원팀 과장)씨의 목소리를 듣자 성자 할머니의 얼굴에 이내 웃음꽃이 핀다. ‘선생님’하고 부르며 내민 손이 누구보다 따뜻하다.

“선생님, 좀 쉬세요. 며칠째 계속 못 쉬셨잖아요. 이렇게 일하셔서 어떻게 해.”

할머니의 수다꽃도 활짝 피었다. 라파엘밴드에서 노래한 안드레아 아저씨를 만나 중얼중얼 담소도 나눈다. 성모상 앞까지 손을 잡고 걸어가 예쁜 사진도 함께 찍었다.

숙소에서는 한 장애인이 수건을 개고 있다. 시각장애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지만 몸이 덜 불편한 이가 더 불편한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손을 씻겨주고, 직접 침구를 정리해주기도 한다.

여주 라파엘의 집을 나서는 길, 안드레아 아저씨가 손을 잡는다. 매일 가톨릭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를 떠올리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라파엘밴드와 사물놀이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다재다능한 아저씨다.

안드레아 아저씨와 같은 많은 시각중복장애인들이 사는 곳, 여주 라파엘의 집은 오히려 그곳을 찾는 멀쩡한 이들의 메마른 마음을 치유하며 20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파엘의 집에서 만난 수많은 라파엘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치유의 천사 라파엘은 시각중복장애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기도모임을 이끄는 성자씨(왼쪽)와 안드레아씨가 성모상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