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51) 소화데레사 (1) 생애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1-08-11 수정일 2011-08-11 발행일 2001-03-04 제 223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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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일을 비상한 사랑으로 수행’
선교지와 선교사들 수호자
리지외의 데레사 마르땡은 15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그 울타리에서 나온 적 없었지만 「선교지와 선교사들의 수호자」로 선언되었고, 체계적 신학 논문 한 편도 쓴 적 없엇지만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또한 데레사는 범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고한 영성이나 엄격한 수덕을 주장하지 아니했고 여느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그러나지 않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24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성 비오 10세가 담화 중 일컬음)이라 일컬어졌으며 시복, 시성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위대하게 했을까? 그 비결은 「일상적 일을 비상한 사랑으로」수행한 그녀의 「작은 길」에 있었다.

데레사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1873년 1월 2일 아버지 루이 마르땡과 어머니 아젤리 게렝 사이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지 이틀만에 튼언니 마리아가 대모를 서며 세례성사를 받았다.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 데레사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유모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랑송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말레 마을에서 데레사는 유모 로즈 댈레에 의해 14개월 정도 양육된 후 집으로 돌아왔다. 22개월 된 아기 데레사는 예수님께 소리내어 기도를 하여 가족을 기쁘게 했고 네살 되었을 때엔 여덟 살 된 언니 세레나에게 하느님의 전능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데레사는 가족의 따뜻한 애정에 감싸여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풍부한 감수성을 지녓으며 나이에 비해 영리했고 놀라운 통찰력을 갖추었다.

이 어린 데레사에게 큰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다섯 살도 되기 전인 1877년 8월 28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후 어린 데레사는 가족들과 함께 외삼촌이 살고있는 리지외의 뷔소네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어머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 온 데레사는 온통 달라진 새로운 세계에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1881년 10월 3일 여덟 살의 데레사는 리지외의 베네딕도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적도 뛰어났으나 생활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데레사는 네 살에서 열네 살까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1882년 10월 2일 둘째 엄마로 선택하고 의지해오던 폴리나 언니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데레사는 그 당시 마음의 상태를 뒷날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칼에 찔려 꿰뚫리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저는 둘째 엄마를 잃는다는 것만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슬프게 많이 울었습니다』

데레사는 한 학년 월반해서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3학년에 들어가 우등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교구의 규칙에 정해져 있던 연령에서 이틀이 모자라 첫영성체 자격에 미달되었다. 외숙부와 함께 교구장 주교에게 특별 허락을 청하러 갔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데레사는 두 엄마를 잃은 슬픔과 첫 영성체가 보류되는 아픔 등 정신적 충격으로 신경 계통의 병에 걸리게 되었다. 다음해 5월 8일 그녀는 그토록 고대해 오던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날의 추억을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1883년 5월 13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기도하던 중에 성모님상에서 온유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면서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되었다.

1886년 10월 7일에 레오니아 언니가 글라라 관상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며칠 후인 10월 15일 셋째 엄마 역할을 했던 마리아 언니가 가르멜에 입회했다. 아버지 곁에는 셀리나 언니와 자신만 남게되면서 데레사에게 집안 분위기는 삭막한 지경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인간적 실망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발전시켰다. 『언니의 결심을 알게되자 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가지지 않겠노라고 작정했습니다』.『제 마음을 언니에게 말할 수 없게 되어 저는 하늘 쪽으로 몸을 돌이켰습니다』.

데레사는 인간적인 낙심, 슬픔을 은총 안에서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갔지만 아직 세심증과 극도의 민감성으로 자기 폐쇄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886년 성탄 밤에 그녀는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받으며 치유의 은총을 체험했다. 9년 후에 데레사는 그때 자신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이 이루신 기적이었다고 확신했다. 『10년 동안 제 노력으로 안 되던 것을 예수님이 한 순간에 이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9년간 고통을 겪으며 잃었던 힘을 마침내 되찾게 되었고 그후로는 그 힘을 다시 잃지 않았다.

데레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 올랐고 그 열망은 결국 가르멜 수녀원 입회를 결심하게 하였다. 열 네살 된 데레사의 입회 지원은 연령 미달의 이유로 가르멜 지도신부로부터 허락되지 않았고 교구장 위그랭 주교를 방문하여 관면을 요청했으나 역시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교황께 호소하기로 마음먹고 로마에 가 1887년 11월 20일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였다. 교황께 소원을 간곡히 말씀드렸으나 쇄도하는 다른 알현자들의 순서에 밀려 그녀가 원하는 답을 받지 못했다. 결국 데레사는 이듬해 4월 9일 15세의 나이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9개월간 지원자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기쁘게 살면서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성격, 자라고 교육받은 상황 및 일상생활 습관의 차이로 인해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889년 1월 10일 그녀는 「예수 아기와 성면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선택하고 착의식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 9월 24일에 서원을 했다. 그녀의 서원 예정인은 1월 11일이었으나 장상들에 의해 연기되면서 8개월 간의 시련을 겪은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데레사는 1893년 2월 20일 수련장 보조자로 발령 받았다. 둘째 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데레사로 하여금 수련장을 보조하도록 했던 것이다. 데레사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직접 배운 「작은 길」로 수련자들을 인도하고자 했다.

1894년 7월 29일 데레사의 아버지 루이 마르땡이 세상을 떠났다. 그 해 9월 14일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던 언니 세레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언니가 입회하면서 다섯 자매 모두 수도자들이 된 것이다. 세레나는 동생 데레사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10월말 데레사는 언니인 아녜스 원장 수녀의 명으로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고 더욱 강렬히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절감하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싶어했다.

그리고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에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했다.

데레사는 1896년 4월 3일 성 금요일 새벽 첫 각혈을 했고 그 후 건강이 점점 안 좋아졌으며 이듬해 4월 6일 원장 수녀는 데레사의 마지막 말을 적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8일 데레사는 자신의 방에서 병실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거기서 스녀는 자신의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을 마치고 투병 중에 「작은 길」을 모든 영혼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느꼈다. 1897년 8월 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9월 30일 저녁 7시20분 데레사는 탈혼 중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며 미소를 지은 채 숨을 거두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데레사는 1923년 4월 29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17일 시성되었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