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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로서의 한국생활] 스리랑카 노동자 하브(32)씨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1-07-12 수정일 2011-07-12 발행일 2001-01-21 제 223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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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꿈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1997년 7월 여름이 한창이던 한국에 첫발을 디딘지 벌써 4년이다. 충남 보령의 가위 제조회사에서 산업연수생의 신분으로 시작된 한국에서의 삶은 고향 스리랑카에서의 삶 못지 않은 감회를 품게 만든다.

한국에 오게 된 것은 그리 깊지 않은 한국에 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같은 아시아 나라인데다 좋은 나라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내인 샤말 말리(31)는 갑작스런 나의 뜻에 반대도 했지만 미래의 꿈을 찾아 두달 터울로 내가 있는 한국으로 왔다. 콜롬보에서 대학까지 나와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아내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보령에서는 하루 12시간씩 열심히 일했지만 내가 받을 수 있는 돈은 36만원. 그나마 회사에서 은행적립금으로 15만원을 떼고 나면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연수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웬만한 끈기로도 참기 힘들었다. 그렇게 시작왼 이직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 이르기까지 5곳을 7번이나 옮겨 다니게 했다. 그 사이 저임금에 힘들었던 기억과는 별개로 월급도 떼이고 맞기까지 했던 일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겪었을 법한 일아리 가슴 한곳이 늘 아프다. 지난 99년 12월 지금 이랗고 있는 포천의 연사공장에 오기 전에 근무한 회사에서도 아내와 주야간 교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아내가 아파서 결근했다는 이유로 한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지난해 9월에는 첫 딸 샤키가 태어났다. 한국말은 물론 한국책도 잘 읽는 아내는 요즘 샤키에게 한국 동화책을 읽어주며 모처럼 행복을 맛보고 있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른다.

1년 넘게 열심히 일한 덕에 지금은 월급도 올랐다. 이 가운데 6만원은 스리랑카 누나집에 계신 아버지께 부쳐드리고 있다. 타향살이 4년만에 모처럼 자식노릇을 해보는 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모아 450만원을 저축했다. 이러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소중한 꿈 하나를 키워왔다. 스리랑카에는 길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은데 이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앞으로 1년간 더 모으면 고향에 돌아가 버려진 이들을 위한 조그만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꿈을 갖게 해준 한국의 많은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아울러 좋은 분들이 많은 한국이 몇몇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로 빛이 가려지는 것 같아 몇 말씀 드리고 싶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 나름의 희망을 품고 이 땅을 찾은 젊은이들이다. 꿈이 있는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한국의 기업주들은 나름대로 미래를 꿈꾸며 우리를 초대한 이들이다. 나는 누구의 꿈과 미래는 소중하고 다른이의 것은 하찮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를 초대하기 시작한 역사가 길지 못해 경험이 부족해서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세기에는 이런 관계를 털어 버릴 수 있도록 한국의 제도가 올바르게 정비돼 서로가 서로의 꿈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했으면 한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