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생의 회고] 79. 교적의 어제와 오늘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9-16 제 142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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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迫害때 교적이 유다스 노릇도
1992년경 정식 교적 만들어져
「아기」「간난이」많은건 일제의「조선호적령」때문
70여년전 그러니까 내가 8세 되던 시절이다. 그때 아버님이 공소회장직을 맡아보셨는데 봄가을이 오면 본당신부님으로부터 배정기 (配程記) 가 온다. 백지를 두루마리 식으로 똘똘만 배정기를 파발꾼 교우가 들고 오면 아버님은 몇 주일을 두고 교우들에게 낭독해 주신다.

그 내용인즉 (지금 회고해보니) 신앙 윤리 도덕 각 성사에 대한 말씀 교훈인 것으로、신부님의 순회공소명과 도착 출발일 정도 끝에 적혀 있다. 이 배정기는 공소를 죽 돌며 마지막에 본당신부에게 되돌아가는데 본당신부님은 이를 보고 각 공소가 내용을 잘 파악한 것으로 알게 된다.

공소에 이 배정기가 도착하면 그날 밤부터 아버님은 백지 두루말이를 만들어서 먹글씨로 각 교우 가정의 명단을 발기 (發起) 해 나가시는데 이를테면 성ㆍ본명ㆍ속명ㆍ연령ㆍ교우가정 그리고 각 가정 식구들을 연령순으로 적고 맨 아래 비고난에 첫 영성체 혼배 첫 고해 보례 영세자 등을 표기한다.

다 준비가 되면 똘똘 말아서 천정에 꾹 찔러 두신다.

그리고 주일저녁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소집 (우리집)에 모아놓고 찰고를 하신다. 잘하면 쪽상본 하나를 상으로 받고 못하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못 받고 아주 잘못한 아이는 회초리로 종아리 혹은 손바닥을 틀린 번수대로 때린다.

한번은 내가 7살 때 찰고시험을 잘 봤는데 회장아들이라고 글쎄 아무것도 안주지 않는가. 그래서 냅다 방바닥에 벌떡 자빠져서 풍뎅이같이 뺑뺑 돌며 눈물 콧물에다 대성통곡 협박을 했다. 그랬더니 내 울음을 틀어막느라고 대번에 고운 쪽상본을 주셨고 싸이렌 소리는 뚝 그쳤다.

방안 사람들이 모두 날 놀렸지만 그래도 난 나고 상이라고는 (억지상) 그것이 처음이라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아주 좋다.

그 두루말이가 바로 교적이다. 그런데 왜 책으로 만들지 않고 두루마리 식으로 기록해서 그것도 천정에 꾹 찔러두는가?

1794년 12월 17일 우리 첫 본당 신부님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비밀 입국하시자 마미金汝三 (요한ㆍ혹金汝相) 이 교우들 명단을 교묘히 입수、돈을 요구하려고 주 신부님과 정약종외 많은 초창기 우리 선조들 가슴을 서늘하게 했고 급기야는 악마 같은 유다스역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아마 두루말이로 뚤뚤 말아서 눈에 뜨이지 않게 천정에 꾹 찔러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교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나의 은사이기도 한 서울교구 유에밀리오 드브레드 부주교님이 1921년 5월 1일 명동대성당에서 민 주교님으로부터 성성 되고 그 이듬해 즉 1922~1923년 사이에 정식교적이 작성됐다.

1923년 여름방학 수원화성군 봉담 면왕림 갓등이본당에는 대신 학생 세분이 계셨다. 이여구 (李汝求ㆍ마티아) 부제 박동헌 (朴東憲ㆍ마르꼬) 오영렬 (五永烈ㆍ요셉) 등 3인 부제님 (그때는 검은 수단만 입으면『부제님』이라 불렀다) 이 갓등이본당 관할공소를 3분、교구서 내려온 라틴어 교적용지를 들고 일일이 공소를 찾아 교적을 만들었다. 나는 이여구 부제님을 따라 수원 삼리공소 (지금조암공소) 와 안중공소 등 14개 공소를 일일이 찾아 교적을 만들었다. 그때 교적은「STATU.S ANIMARUM」이라고 인쇄된 용지였다.

이 기회에 많은 순교자들의 후손과 친척、그리고 직접 투옥되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선교자유로 석방된 이들로부터 많은 순교사화를 들었다.

그때의 감동이 어찌나 컸든지 지금도 그 많은 얘기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또 한가지 그때 공소를 돌다보니 70ㆍ80세 된 안노인들의 속명이 아기ㆍ아기씨ㆍ계월이ㆍ작은아기 등으로 기입되었고 20~50대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춘월이 계향이 춘향이 명월이 송자 등등 기생이름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맨 처음 호적꾸밀 때 서기들이 천한 여자ㆍ기생이름을 다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말기에도 호적이 있었다고 추측되는 바이고 일본나라 (奈良) 정창원 (政倉院) 에서 발견된「신라의 戶國帳籍」이 그 좋은 증거자료이다.

1896년 호구조사 규칙이 제정되면서 이조말기에 해마다 호적이 수정되었고 각 호에는 호패 (문패)를 달게 했다. 그 뒤 일본인들이 1922년 조선호적령을 반포하면서 호적을 재정비한다는 것이 그만 젊은 부인은 모조리 기생이름이 주어졌고 70ㆍ80고령의 할머니들은 늙으면 아기가 된다고 글쎄 아기ㆍ간난이ㆍ작은아기 등으로 명명돼 고령으로 세상을 하직할 때도「아기」였다.

그래서 우리 1백3위 성인명단에도「아기」이름이 많았고 그대로 성인 성녀 명칭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