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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71. 교황께 올린 세번째 편지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6-03 제 1408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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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그레고리오 16세 敎皇께 
“蘇 주교임명에 감사─꼭 모시겠다” 다짐
1835년 1월 19일, 유아우구스띠노 진길이 북경에서 조선교우를 대표해서 두통의 편지를 썼다. 즉 그 한통은 브뤼기애르 소주교에게 올리는「조선입국을 영접해 드리겠읍니다」라는 뜻의 내용이었고 그 편지를 왕요셉이 소주교에게 직접 전달했다.

또 다른 한통의 편지는 로마 교황성하(註: 그레고리오 16세)께 올리는 것이었는데「소주교를 첫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면서 의심 없이 주교를 조선 땅에 모셔 들이겠다」는 다짐의 내용이었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편지는「마카오」로 보내져서 라띤어로 번역되어 교황성하께 올려졌다. 이 편지는 포교성성(現인류복음화성성) 직속 경리부차장 움삐에레스 신부가 번역하여「로마」로 발송했는데 이 신부는 독립된 조선교구설정에 옴으로 양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럼 우리 조상들이 교황께 세번째 올린 글을 여기에 옮겨보기로 하자.

백배고두 상언(百拜叩頭 上言)

교황 폐하께 만만세를 앙축하오며 죄인 아오스딩(註:유진길)등이 엎디어 아뢰옵니다.

삼십년 전(註: 1801년 5월 31일)에 주 신부(註:주문모 신부) 치명이후로부터 조선에 감목이 없사온 즉 우리 주 예수의 좋으신 목자의 불쌍한 양, 우리들이 목자가 없어서 근심하옵고 죽기를 간신히 면하던 중에 다행히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작년 11월에 유 신부(註: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무사히 들어온 후 이때까지 평안히 있나이다.

지금 다시 만만번 감사하는 은혜는 오 주 예수의 보배로우신 성혈의 거룩한 은혜로 조선교구 첫 주교 소주교를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목이 다만 하나의 생명으로 만번 죽을 지경을 당하여 온갖 고난과 위험을 겪었으며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교황칙령을 받들겠나이다. 소주교는 위험한 조선국에 들어올 마음을 작정하셔서 생사에 상관없이 이왕 정원한대로 하겠다하오며 우리 감목(註:소주교를 지칭)의 열심과 사랑함과 인애함이 태우는 불과 같사옵니다.

이것을 본 죄인들이 어찌 감동치 아니하며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아니하오리까. 이런 은혜가 우리나라를 살리시는 인자하신 천주의 특별한 은혜인줄 어찌 모르겠나이까.

주교를 영접하는 모든 일은 유 신부를 영접하던 방법으로 하겠나이다. 주교께서 금년 11월에 조선근처에 이르러 기다리면 폐단 없이 영접하여 드리겠읍니다. 천주께서 도와주시면 어려운 일이 쉬워지고 위태로운 일이 평안해져서 두려워할 것이 없겠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교황폐하께 엎디어 비나니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성교회가 평안하고 이단이 소멸하고, 조선에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나타남을 빌어주시기를 바라옵고, 우리를 도와주사 모두 천당에 올라가게 되도록 빌어주소서. 이것이 모든 복된 일중에 제일 큰 복됨이로소이다.

이후에도 다른 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원하면 죄인들이 그 원하는 바를 받들어 가득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영접하겠나이다.

강생 후 1천8백35년 1월 19일 북경 남당에서 죄인 유아오스딩, 조가롤로, 김방지거 등 백배상서

소주교께서 교수로 재직하던 비낭대신학교를 떠나신지 만 4년이 지났고,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줄 안지 3년3개월만인 1835년 10월 20일, 만주 벨리구 한 촌락에서 조선 땅에 발 한번 내딛지 못하고 그만 안타깝게도 영민하시고 말았다.

조선교구 1백주년 경축때인 1931년 9월 24일 배나스도 뽀요 표 신부가 봉천에서 그 유해를 받아 서울로 왔다. 명동대성당 지하에 모셨다가 1931년 10월 15일에 용산성직자묘원(註〓현용산구 천수동소재)에 원 부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될 때, 필자도 3ㆍ4품을 받은 신분으로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1931년 9월 9일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 된지 96년 만에 그 유해만이라도 조선 땅에 모시게 된 것이다. 살아생전 사목교구의 흙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말씀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그 유해만이 안장되었으니 영결미사에 참석했던 필자는 애통한 슬픔과 천사만념(千思萬念)의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