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젊은이와 만남 강론 전문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5-13 제 140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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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ㆍ정의ㆍ평화ㆍ믿음은 꺾일 수 없는 젊은이의 무기”
친애하는 서울의 젊은이 여러분,

친애하는 한국의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을 만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대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여러분을 만나서 기쁜 것은 바로 여러분이 젊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좋습니다. 왜냐하면 젊다함은 진실을 귀하게 여길 줄 앎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보람 있는 삶의 길을 찾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젊다함은 진리와 정의와 평화, 미와 선에 이끌림을 말합니다. 젊다함은 한껏 살고 싶음을, 살 값어치가 있는 삶을 살고 싶음을 뜻합니다.

젊다함은 이상과 희망으로 가득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또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이런 귀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삶을 여러분이 더 사랑할수록, 여러분의 희망이 크면 클수록 여러분의 두려움 또한 때로는 그만큼 더 클 수가 있읍니다. 여기 문제되는 것이 잃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하느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단 하나의 인생이 그것이니까요. 젊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이고 또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이 만남을 위해 여러분은「하느님-나-겨레」를 주제로 택했음이다. 모두 중요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말 이상의 것입니다. 희망과 번민이 뒤얽힌 물음을 제기하는 말들입니다. 거기에는 여러분 일생의 귀결을 좌우할 만한 숙제와 포부가 담겨 있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명제를 걸고 혼자서, 여럿이, 하느님과 함께 말하고 싶고 묻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줄로 압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여러분도 사는데 대해 중요한 물음을 안고 있읍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성인 사회의 더 넓은 테두리 안에서의 생활을 묻고 있읍니다.

여러분 자신의 생활에는 여러 가지 근심스러운 일들이 있읍니다. 왜 학교는 그토록 무자비한 경쟁의 터전일까. 왜 집에서 듣는 것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서로 다를까. 왜 기성세대 사람들은 젊은이와 젊은이의 생각과 소원을 좀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까. 생활 주변에서 보는 온갖 허위와 모순과 불의를, 마치 사회 실정으로는 불가피한 것처럼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일까. 산다는게 여러분 중 특히 어린나이에 벌써 고달프게 일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어째서 마치 구조적인 장벽과 부딪치는 듯이 힘겨운 노릇이어야 하나. 여러분 나라와 폭력과 미움으로 가득한 오늘의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또 교회에 관해서도 물음이 있읍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과연 충분히 가까이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복음을 따라 살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보살피며 온갖 이기심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을 형제자매로 다루도록 여러분을 감도하고 있는가.

이처럼 여러분이 묻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희망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모두에게 미래의 희망인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을 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때로는 여러분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몰이해의 벽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갈 길은 있으니까요. 용기를 냅시다. 여러분의 길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에 여러분은 모든 기쁨과 근심, 두려움과 희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온 것입니다. 베드로 성인 말씀대고『주님, 우리가 어디로 가겠읍니까. 주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요한 6ㆍ68).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여러분을 위한, 한국의 모든 젊은이를 위한, 온 세상의 젊은이를 위한, 영원한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저녁 예수께서는 바오로 성인이 젊은 제자 디모테오에게 하신 말씀을 빌어 여러분에게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라』(Ⅰ디모 6ㆍ12)고 하십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미 세례로 예수님을 받아들였고 견진성사에서『믿음의 싸움은 잘 싸우라』고 튼튼한 힘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그「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본시오 빌라도 앞에서의 증언에서 떳떳한 고백을 하신 그리스도』(Ⅰ디모 6ㆍ13)를 믿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겠지요. 빌라도는 예수님을 거슬러 제기된 고발을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이 누구인지를 뚜렷이 고백하면서『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나 이 세상에 왔노라』 (요한 18ㆍ37)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가 증언한 진리란 어떤 것이였읍니까. 그것은『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라는 것, 누구나 예수님을 보는 이는 곧 하느님을 본다』(요한14ㆍ9참조) 는 그것입니다. 그 진리란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또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 『복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구원자이시며 왕중 왕이시고 군주중의 군주로서 홀로 불멸하시고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인간이 일찍이 보지도 못했고 또 볼 수도 없는 분』(Ⅰ디모 6ㆍ15∼16)이시라는 것입니다.

온 인류와 우리 각자가 제 나름으로 찾던 이 하느님이 예수님에 의해 우리와 온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주시고 죽은 이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의 이 진리의 고백을 확인하였읍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빠스카희생에서 여러분 자신의 몫을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은 바오로사도가 디모테오에게『그대가 불리운전 영원한 생명을 꼭 붙잡으라』 (Ⅰ디모 6ㆍ12) 고 하신 말씀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불신을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여러분 자신의 불신을,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처럼 도무지 관심이 없거나 또는 자기 인생의 참 뜻을 찾을 희망마저 버린 이들의 불신을 거슬러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처럼 그들은『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답도 기대하지 않고 가버립니다.

다음으로는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적당히 약화하려는 유혹,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하시는 개인 또는 집단도덕의 요청을 약화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르치려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이 유혹을 거슬러 싸우는 것이 곧『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는』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실생활에 있어서 지금 여기서『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Ⅰ디모6ㆍ13), 그리고 우리시대의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떳떳한 고백」을 여러분 나름으로 할 수 있을까를 물을 차례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나-겨레」가 여기 어떻게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면 어떤 길을 가야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들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두가지 사는 방법을, 인생의 두가지 태도를 우리는 봅니다. 그 하나는 그릇된 것으로 거부되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삶다운 삶」 (6ㆍ19)으로 이끄는 옳은 길입니다.

첫째 태도는 「오만한 이 세상 부자들」의 그것으로서, 재화와 이에 따르는 특전, 권력, 세도 등만을 믿는 태도입니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만을 믿고 선을 행하는「착한 행실로 부자」인 사람들의 태도가 있읍니다. 문제는 재산을 실제로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행실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젊거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희망과 꿈의 지평을 권력과 물질적 행복의 추구에만 둔다면 마음으로는「부자」이고 「오만」할 수 있읍니다.

이 길을 가고 싶은 유혹은 여러분도 잘 알듯이 과연 큽니다.

특히 사람들 말마따나 소위「현실적으로」는 불의로 이처럼 가득하고 이처럼 냉혹하고 거친세상,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일컬으신「온유」하고「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설자리도 없는 세상에서, 착하고 이기심 없게 살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결국 아무 소용도 없다고 느낄때면 그 유혹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패배주의를 거슬러 싸우는 것이『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는』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의 젊고 순박한 얼굴을 바라보면 여러분이 올바르게 살고 싶어함을 나는 알 수가 있읍니다. 단념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여러분이 가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싸우면서도 여러분 자신의 삶에 있어 불의를 불의로, 폭력을 폭력으로, 또는 다른 어떤 악을 악으로 대항하려는 자가당착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무기는 다릅니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와 믿음이라는 꺾일 수 없는 무기입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여러분이 발휘하는 힘도『하느님말씀인 성령의 칼』 (에페6ㆍ10∼17 참조) 입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만이 승리로 가는 길이며, 화해와 사랑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꼭 하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길을 가기로 택하는 마당에는 온 교회가 여러분 편에 함께 있읍니다. 여러분은 한국에 있는 이 교회의 젊은 세대로서 여러분 땅에서의 선교 2백년을 천주 성삼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 유산을 완전히 이어받아 앞으로 올 세대에 전해 줄 차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교회에서 마음 편하게 느낀다는 것, 교회 안에서 자리 잡고 본당 공동체 생활과 사도직에 점점 더 참여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 (마태5ㆍ16)

여러분은 진리의 길을, 선함과 자비, 정직과 사랑, 용서와 화해의 길을 택했음을 세상이 알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관용과 극기와 기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누가 묻거든『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이라고 대답합시다.

여러분은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당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은혜야말로「삶다운 삶」 (6ㆍ19) 으로 여러분의 삶의 길을 비추어 주는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이 삶의 참다운 뜻을 다 깨치고 이를 한껏 살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생기가 넘치게 살아있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형님이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기도로 일치됨으로써 입니다. 『여러분에게 은총을 빕니다』 (6ㆍ21)

그리고 이 제일 좋은 시절인 5월에, 젊은이의 달이자 성모 성월에, 「은총이 가득하신 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그리도 안에 영원히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