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영광의 성지] (끝) 옥터

이윤자 차장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11-13 제 138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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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ㆍ유대철 등 24위 순교지
「좌ㆍ우 포도청」「의금부」「전옥」등서 옥사 또는 교수
두번째로 많은 복자 탄생한 곳
현재「우포도청」만 삼선공원 내 남아있어
끝없는 유혹과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기를 원했던 무수한 순교자들. 그들은 새남터 벌에서 또는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망나니의 칼춤 앞에 망설임 없이 영광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뿌린 피가 이 땅을 적시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우리의 순교자들은 표현할 길 없는 굴욕과 멸시, 그리고 무서운 고문 속에 소리도 없이 무수히 죽어갔다. 서울의 옥터.

좌ㆍ우 포도청을 비롯, 의금부, 전옥 등으로 구분되는 서울의 옥터는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모진 고문과 형벌을 치뤄냈으며 또 죽어간 찬란한 신앙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서울의 옥터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우리의 교회사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신앙의 보루라고 감히 지칭할 수 있다.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를 비롯 정하상ㆍ현석문ㆍ남종삼 그리고 앵베르 범 주교ㆍ베르뇌 장 주교 등 지도자급 성직자 평신도들과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이곳을 거쳐 순교자의 영광을 차지했는가 하면 최경환ㆍ유대철 등 또 다른 순교자들이 바로 이곳 옥터에서 순교자의 화관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서소문ㆍ새남터 등으로 끌려 나가기 전까지 갖은 악형으로 죽음의 경지를 맛보았던 옥터야말로 순교 그 자체를 의미하는 제1의 순교지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과 역사를 담고 있는 서울의 옥터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몇몇 교회 사가들의 안타까움 속에서 겨우 장소와 기록 등 소수의 자료만이 뒷받침되고 있을 뿐 세월이 지날수록 잊혀질 수밖에 없는 이 영광의 성지는 현재 한 뼘의 땅도 확보되어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내하는 와중에서 현조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장소를 확보한다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소를 확보할 수가 없다 하더라도 무수한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죽어간 신앙의 고향을 기억하고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는 신앙을 사수하며 믿음을 증거하던 영광의 장소임을 입증할 수 있는 팻말이라도 세워야한다는 것은 뜻있는 사가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지금까지 확보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정확한 고증을 통해 서울 곳곳에 산재해있는 옥터자리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안내판을 세우는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재 獄死 또는 絞首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순교자들의 핍박의 장소는 대역 죄인을 잡아들여 문초하던「의금부」, 이들을 가두고 심문하던「좌ㆍ우 포도청」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옛날의 역할이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이곳들은 의금부의 경우 최근까지 신신백화점이었으며 지금은 제일은행본점을 신축하고 있다. 또한 좌포도청은 지금의 단성사와 그 옆의 소방서자리, 그리고 우포도청은 동아일보사와 광화문 우체국이 들어서있는 바로 그 장소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은 우포도청 한곳뿐. 이 우포도청은 일제 때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삼선공원으로 이전돼 지방 유형문화재 제37호로 명명돼 보존되고 있다.

길고 긴 순교사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 옥중 순교ㆍ옥사ㆍ형벌고문 중 치사 또는 교수로 표기되어 있는 순교는 모두 좌ㆍ우 포도청에서 전개된 사건을 말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우리교회순교사상 경이적인 사실로 평가되고 있는 소년 유대철이 불과 13살의 어린 나이로 당당히 순교대열에 나아갔는가하면 15살의 소녀 이바르바라 역시 주님을 증거하며 모진 악형 속에서 순교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를 길러낸 복자 최경환이 바로 이 옥중에서 끝내 믿음을 사수하며 죽어갔고 또한 역시 복자 장성집이 좌포도청에서 끝없이 가해지는 곤장과 고문 끝에 치사를 당하는 등 의금부와 좌ㆍ우 포청에서는 곤장ㆍ치도곤ㆍ태형 아래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들이 이름도 없이 죽어간 것이다.

이같이 옥중치사ㆍ교사가 크게 늘어났던 이유는 무고한 천주교도들을 죽인 만행이 노출되는 것을 겁낸 나머지 기해박해 이후에는「쥐도 새도 모르게 옥중에서 죽이는」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주님의 뒤를 따랐던 순교자가운데 23명의 순교자가 복자의 대열에 올랐으며 이분들은 이어질 성인선포식과 더불어 온 세상의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영광된 위치에 오르게 됐다.

옥사한 23명의 순교복자는 다음과 같다.

▲1838년 순교 (괄호 안은 세례명ㆍ순교당시 나이)=이호영(베드로ㆍ36)

▲1839년 순교=정군보(쁘로따시오ㆍ41), 장성집(요셉ㆍ54), 김바르바라(35), 이바르바라(15), 최경환(프란치스꼬ㆍ35), 김루치아(71), 이까타리나(57), 조막달레나(33), 유대철(베드로ㆍ13), 유소사(체칠리아ㆍ53)

▲1840년 순교=김데레사(44), 이아가타(17), 정화경(안드레아ㆍ33), 민극가(스떼파노ㆍ53), 허협(바울로ㆍ45)

▲1846년 순교=한이형(라우렌시오ㆍ48), 임치백(요셉ㆍ43), 남경문(베드로ㆍ40), 우술임(수산나ㆍ44), 김임이(데레사ㆍ36), 이간난(아가타ㆍ33), 정철염(까타리나ㆍ30)

이윤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