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영광의 성지] 8. 관덕정

박태봉 부장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10-30 제 137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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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이윤일의 순교지
문경 여우목서 체포돼
경상도지방 유일의 순교복자
오늘날 그 일대엔 민가와 병원이 들어서
경상도 지방에서 순교한 많은 신자들 중 유일하게 복자품에 올랐으며 이제 곧 성인품에 오르게 될 복자 이윤일(李允一ㆍ요한). 그가 그토록 용감히 주를 증거했고 마침내는 흔쾌히 목숨 바쳐 이 지방 교회의 초석을 다졌건만 아직도 그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찾지 못하고 또한 그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목숨 바친 관덕정(觀德亭) 순교지마저 성역으로 가꾸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현실은 명예롭고 세계만방에 자랑스런 신앙선조들을 올바르게 모시지 못하고 있는 후손의 부끄러움과 무성의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있다.

복자 이윤일의 고향은 충청도 홍주(洪州)이고 그 가정은 5~6대를 내려오는 신자 집안으로서 그의 조상이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을 지켜왔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또한 그가 어느 때 경상도로 옮겨왔으며 문경 여우목(弧項里)에는 언제부터 살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치명일기」에 복자 이윤일에 대해『을축년(1865년)에 공주에서 치명한 이시몬의 부친이 문경 여우목(苦項)에 살 때 본읍 포교에게 잡히어 상주로 이수하였다가 영문(營門ㆍ곧 대구감영)으로 가서 치명하니 때는 병인년 12월 16일이더라』고 기록돼있다. 또 공주에서 순교한 이윤일의 아들 시몬에 대해「치명일기」는『본래 내포사람이요 례목리 회장의 아들이라. 전사베리오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달레교회사에는 이윤일의 아들이『시몬이 아니고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 아버지 이윤일은 요한 세자이고 아들은 사도 요한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윤일은 아들 요한이 공주에서 교살된 지 1년 닷새가 지난 뒤 순교한 셈이 되고 그의 유해를 거두려고 대구 감영으로 두 형제가 왔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형제는 3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복자 이윤일에 대한 내력이 불분명한 것은 병인박해 당시 전국에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먼저 죽이고 나서 후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지방에서의 박해는 중앙에 보고되지 않은 채 마구 진행됨으로써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병인년 박해에서만 1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전국서 발생했으나 24명이 복자품에 오른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복자 이윤일에 대한 순교사실은 위에서 언급한「치명일기」와 병인년 순교자 시복(諡福)조사 때 증인들이 증언한 내용 외에는 더 밝혀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복자 이윤일이 체포되기 전 살았다는 문경 여우목은 인적이 드물고 교통 또한 불편해 박해를 피해 다니던 당시 신자들이 숨어 살기로는 적합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윤일은 바로 이 여우목 교우촌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체포된 시기는 병인년 10월 12일(양력 11월 18일)로 첫 추위가 막 닥칠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대구감영으로 넘어온 시기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은 없고 다만 한 가지 전해지는 증언은 상주를 떠날 때『교형자매들, 나는 지금 오주 예수를 따라 치명하러 대구 감영으로 갑니다.

여러분이 행여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천주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열심하게 살다가 나의 뒤를 따르도록 하기 바랍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윤일 회장은 상주 목사한테서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형집행을 위해 대구감사아문으로 넘겨져 감영에 넘어 왔기에 문초나 형벌에 대한 기록도 전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선참후계령에 따라 상주목사의 사형선고대로 감영에서는 형 집행만을 담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의 처형은 이미 을해(1815년) 정해(1827년) 박해때 10명을 처형한바있는 남문밖 관덕정에서 있었다. 그날은 약 30년 만에 또다시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아미산(嵋山)이라는, 산이라기보다 민둥민둥한 언덕배기의 무인지경에 위치해있던 관덕정위에 사형집행관인 영장이 좌정하고 붉고 푸른 기(旗)가 나부끼는 형장에는 이윤일 회장이 꿇려져있었으며 영장의 사형집행문 낭독이 그치자 사형수는 참수대로 끌려갔다.

형졸들이 그의 오라를 풀자 이윤일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희광이 두목에게 건네주며『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3명의 희광이 중 한명이 칼로 목을 내리치자 단번에 목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날이 음력 12월 16일(양력 1876년 1월 21일)이었는데 시복 조사 때 한 증인은 순교일이 하루 빠른 12월 15일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윤일의 유해는 그 이듬해 2월(양력 3월) 그의 아들 이위서 형제와 그 매부 이도마가 대구로 와 당시 포졸들이 형장 근처에 가매장했던 시신을 읍 근처인 날뫼(飛山)로 옮겼다고 하는데 아무런 표적 없이 내버려 둠으로써 지금까지도 그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복자 이윤일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를 탄생 시킨 관덕정 일대는 오늘날 J병원과 민가가 들어차 그 때의 순교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현재 대구대교구가 2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의 성역화를 추진 중에 있어 관덕정은 경상도 유일의 첫 성인을 배출한 영광의 성지로 탈바꿈할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을듯하다.

박태봉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