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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성지] 7. 공주 감영

이연숙 기자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10-16 제 137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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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손자선의 순교지
부친등 친지들도순교
1866년 28세로 교수형 당해
현지엔 순교복자성당인 교동성당 들어서
그 어느지역보다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내포지방, 그 중에서도 기록상 2백29명의 순교자를 낸 백제의 고도 공주는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이라 일찍부터 감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순교의 피를 이어받은 복자 손자선(토마)이 용맹히 진리를 증거하다 순교의 화관을 쓴 곳이다. 지금 이 감영자리에는 순교선열들이 피 흘려 물려준 유산을 잘 보존하고 가꾸려는 후손들의 복음의 전당이 들어 서있다.

「내포의 사도」로 불리우는 이 단원에 의해 일찍이 서학이 전래된 공주는 박해속에서도 신앙의 싹이 계속 돋아나 퍼져나갔으며 그럴수록 더욱 순교의 피로 적셔져나갔다. 족쇄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해서 「항쇄바위」라 불리우는 이곳에서 공개처형이 있을 때 내 건너 공산성에는 이를 구경하는 인파가 몰렸었다고 전해진다.

이름없이 순교한 무명순교자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순교지 항쇄바위ㆍ장깃대나루와 함께 생명보다 고귀한 신앙을 지키기위해 소리없이 죽어간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곳이 바로 감영이다. 이제 이곳은 한낱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자리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신앙을 물려준 선조들의 훌륭한 유산이 되었다.

공주 감영에서 점점 심해지는 형벌을 달게 참으며 뚜렷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증거하다가 1866년 5월 18일 28세로 교수형을 당한 복자 손자선은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병인순교자들과 함께 24위 복자품에 올랐으며 또 전 세계가 공경하는 성인으로 추앙받게 됐다.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폈던 다블퀴 안 주교가 합덕에서 고백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할 때는 의례 손자선의 집에서 행하는것이 상례였으며 박해의 회오리 바람속에 성직자의 안전도모와 피신도 도맡아했기때문에 손자선 가문에서는 병인년 이후 계속되는 박해때에도 역시 형과 아버지, 그리고 당숙 손치호 회장이 서울에서 순교하는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처럼 뿌리깊은 3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신자가정에서 자란 손자선이 그의 깊은 신덕을 굳건히 고백하고 증거하다 순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래 부지런하고 성품이 침착하며 총명하여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자란 손자선은 그의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ㆍ저녁기도를 한번도 궐한적이 없는 등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왔다.

안 주교가 체포된 후 포졸들이 신자집안을 샅샅이 뒤져 재산을 몰수해간후 인척되는 이의 물건을 찾아가라는 관가의 전갈에 사람을 보낼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진퇴유곡에 빠진것을 본 손자선은 결연히 일어나 집안을 대표해 관가에 나갔다. 여기서부터 그의 십자가의 고난은 시작됐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단 한 마디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으나 『정녕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하지 않겠다』는 그의 뚜렷한 신념은 덕산에서부터 신자들을 잔인하게 생매장으로 학살을 자행했던 해미까지, 또 해미에서 다시 공주로 압송 되는 등 갈수록 가중되는 혹독한 형벌앞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격분한 관원은 마지막 수단으로 『네가 끝내 천주교를 배반하지않는다는 증표로서 네 이빨로 네 손 살점을 물어 뜯어보아라』고 명령하자 만번 죽어도 배교하지 못하겠다는 손자선은 이빨로 두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손등을 보여 주었다. 바로 이날 그는 감옥에서 목졸려죽었으며 그의 시신은 공주읍 밖 수풀속에 버려졌다.

잔뜩 쌓인 시체더미에서 어느것이 손자선의 것인지 찾을 길이 막연했던 가족들은 손등을 물어 뜯은 흔적이 있는 그의 시신을 찾아내 선산에 안장했다.

이같은 사연이 담긴 공주감영은 현재 주택가 중심지로 순교복자 성당인 교동성당이 들어서있다.

불란서인 방 신부가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 1940년대에 이 지역을 매입했으며 그 이후 근화유치원으로 사용돼오다가 공주지역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지난해 9월 17일 중동본당에서 분리, 신설된 교동본당이 유치원 건물을 개조,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교동본당 신설때까지만 해도 신자들은 이곳이 감영자리였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복자 손자선이 순교한 곳이라는 것은 거의 알지못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교동본당 주임 조장윤 신부는 손자선이 순교한 날에 미사를 봉헌하고 그의 순교내력을 설명하는 등 서서히 신자들에게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시켜나갔다.

복자 손자선의 발자취가 담긴 순교복자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구상하고 있는 교동본당은 성당신축은 뒤로하고 우선 이곳에 관한 자료수집과 함께 3백50평 밖에 안되는 성당대지 구입부터 서두르고 있으나 본당 힘만으로는 힘든 상태다.

그러나 스스로 믿음을 찾아 얻고 박해속에서도 용맹히 진리를 증거, 이 땅에 구원의 빛을 더욱 밝혀준 선조들의 고귀한 신앙을 본받으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그 옛날 영광의 장소는 되살아날 것이다.

▲손자선 (토마) 28세ㆍ1866년 5월 18일 순교 1968년 시복.

이연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