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영광의 성지] 6 .갈매못

이연숙 기자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10-09 제 1375호 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복자 5명 순교한 성지
서울서 보령까지 압송
드블뤼안 주교ㆍ황석두 등 군문효수
2m높이의 (순교복자비) 외롭게 서있어
심한 형벌 때문에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걷는 죽음의 길이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을 올라가야했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고자한 이들에겐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그리스도를 가득 담음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한 길이었다. 서울에서 1백 km 떨어진 한적한 서해안 바닷가에 위치한「갈매못」순교지. 조선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3명과 평신도 지도자 2명 등 5명의 순교복자를 배출한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2구에 위치한 이곳은 한국순교복자 103위 전원이 성인품에 오르게 됐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대전에서 청양ㆍ대천을 거쳐 오천 면사무소에 이르면 갈매못으로 가는 안내판이 보이며 이곳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바다를 낀 도로를 따라 3km정도 가다보면 도로 왼쪽 콩ㆍ옥수수ㆍ깨 등을 심어놓은 자갈밭에 약 2m 높이의 순교복자비가 외롭게 서있다.「순교복자비」라 새긴 비석마저 없었던들 이곳에서 피를 뿌려 바닷가로 흘려보낸 역사의 현장임을 그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얕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가롭고 전망 좋은 어촌이라 생각하면서 무심히 지나쳐 갔을런지도 모른다.

생활풍토ㆍ환경이 다른 박해속의 이국땅에서 양떼를 돌보던 변안의 목자 안 주교와 위앵 민 신부ㆍ오매트르 오 신부, 그리고 목자들을 따라 순교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은 전교회장 황석두ㆍ장주기 등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때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5명 모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또 지난 9월 27일 추기경회의에서 한국순교복자전원을 성인품에 올리기로 최종 승인함에 따라 전 세계인의 추앙을 받는 성인으로 탄생하게 됐다. 갈매못은 이제 후미진 곳에 버려진 땅이 아니라 순교의 피로 더욱 윤택해진 축복받은 땅이 되었다.

조선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 주교는 불란서「아미앙」출생으로 1845년 모진 풍파를 겪으며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이 땅을 밞아 신부를 애타게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 곳곳을 다니며 미사와 영성체ㆍ고백성사ㆍ세례 등을 베풀었으며 순교자 자료를 수집, 「빠리」외방전교회에 보냄으로써 달레의 한국교회사 발간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 4대 교구장 장 주교를 도와 내포지방 전교에 힘쓰던 안 주교는 장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5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4일째인 3월 11일 황석두와 함께 붙잡힘으로써 21년간 이국에서 이룩한 훌륭한 활동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

『나의 스승이며 어버이 같은 주교님이 잡혔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주교님을 따르겠다』며 놓아주는 것도 마다하고 주교 뒤를 따랐던 황석두는 연풍의 양반집안 3대 독자로 과거공부대신 천주학에 심취, 입교했으며 3년간 벙어리노릇까지 하면서 가족들을 영세시키고 안 주교의 복사로서 번역ㆍ출판일을 도왔다.

안 주교의 체포소식을 들은 오 신부와 민 신부도 안 주교의 뜻에 따라 더 많은 교우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자수했는데 그 때가 민 신부는 입국한지 8개월, 오 신부는 입국 3년여 만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돼 의금부에 갇힌 채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사형집행은 고종이 병을 앓게 된데다가 國婚이 가까와짐에따라 서울에서 피를 보면 불길하다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水營 갈매못에서 하기로 정해졌다.

갈매못을 향해 죽음의 대행진을 떠날 때 이들 4명의 뒤를 또 한 신자가 따랐는데 그는 배론 신학당 집주인 장주기였다. 원래 수원서 살다가 거듭된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제천 배론에서 자리를 잡은 장주기는 신학생 뒷바라지와 뿌리띠에 신 신부를 도와 교리책도 번역하고 전교회장의 일도 능숙히 해냈었다.

모진 고문으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1백km 떨어진 갈매못까지 죽음의 대행진이 계속되었지만 이들은 기쁨에 넘친 표정으로 함께 기도드리곤 하여 구경꾼을 어리둥절케 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수난일에 순교하고자 원했던 대로 그들은 성 금요일인 3월 30일 군문효수를 당했다.

이들이 순교한지 1백 9년만인 1975년 9월 당시 대천본당주임 정용택 신부(현 조치원주임) 때 그 당시 순교위치를 확인, 자연석으로 순교복자비를 세움으로써 서서히 알려져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고 있는 갈매못은 그 중요성에 비해 관심과 개발이 아직 미비한 실정이다.

「순교복자비」주변의 9백여 평 땅을 81년ㆍ82년에 걸쳐 당시 대천본당 주임 유영소 신부(현 괴정동주임)때 매입했을 뿐이며 화장실 하나 설치돼있지 않아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이 세 가구가 사는 이곳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실정이다.

교구의 모든 힘을 솔뫼성역화에 쏟고 있는 대전교구는 금년 말까지 솔뫼성역화를 마무리 짓고 내년부터는 교구내 순교성지를 연차적으로 개발할 계획으로 있으며 교구사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비로 1천2백만 원을 책정해 놓고 있다.

매년 순교복자 대축일이면 갈매못서 미사를 봉헌하는 대천본당(주임ㆍ손만재 신부)도 10월말 사목회의에서 갈매못 개발을 위해 본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예정이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복자 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866년 순교 1968년 시복 (괄호 안은 세례명ㆍ순교 당시 나이)= 장주기(요셉ㆍ64) 황석두(루까ㆍ54) 안 주교(다불뤼 안또니오ㆍ48) 민 신부(위앵 마르띠노ㆍ30) 오 신부(오매트르 베드로ㆍ29)

이연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