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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성지] 4. 숲정이

윤강명 기자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9-25 제 137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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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표적 순교지
조화서 등 6명 시복돼
신유박해때부터 많은 신자들 순교
그 땅 위엔 해성 중고등학교 자리잡아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천주」를 믿기 때문에 혈육의 정과 목숨마저 내어 버리고 의연히 칼을 받았던 믿음의 화신들. 단 한 순간만이라도「아니오」라고만 한다면 그리운 처자식과 영화가 그대로 안겨 들어오는 달콤한 유혹도 천상영복을 갈망하는 순교의 길에 아무런 방해도 될 수 없었다.

숲정이-. 신유년(1801년) 기해년(1839년) 병오년(1846년) 병인년(1866년) 등 4차례의 큰 박해의 물결을 한 치의 거스림도 없이 피로 맞았던 숲정이는「천주학쟁이」들의 씨를 말리고자 했던 당시의 상황이 잘 대변해주듯 한시도 순교자들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던 축복의 땅, 영광의 땅이다.

1백3위 복자 가운데 전주교구에서 탄생된 7명의 복자-. 그 중에서도 1명을 제외한 6명의 복자가 한꺼번에 순교한 숲정이는 전주교구 내 10大 순교지 中의 하나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지르고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천변도로를 타고 시가지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해성중고등학교와 그 안에 우뚝 솟은 흰색의 높은 탑을 볼 수 있다.

지금은 3천여 중고생들의 교육道場으로 변신, 옛날의 피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만「숲머리」라고도 불렀던 이곳 숲정이는 당시만 해도 숲이 칙칙하게 우거졌던 곳으로 이조 때부터 극형자를 사형하던 형장으로 사용돼 왔으며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 루깔다 동정 부부가 처음으로 순교하면서 시작된 이 인연은 1801년 12월 28일 자부인 루갈따(순이)의 격려를 받으며 순교의 은총을 평화로이 받아들인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등 李 루갈따 가족의 순교로 이어졌다.

이어 순교자의 용맹한 신심과 항구심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 순교 후 정하상 등과 함께 북경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신부영입을 시도한 신태보를 위시, 이성화 이일彦 정태봉 김태권이 1827년 정해박해때 피체, 13년의 긴 옥고를 치루고 1866년 4월 17일 서문 장날 장꾼들이 보는 가운데 참수돼 순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수만도 22명이 전주에서 순교한 1866년 병인대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순교한 조화서 정원지 정문호 손선지 한원서 이명서 등 숲정이에서 순교한 순교자 6명 모두가 1968년 10월 6일 시복됨으로써 숲정이는 한낱 형장이 아니라 순교의 은총으로 빛나는 땅이 되었다.

소양면 성지동 한마을 신자이기도 한 조화서와 그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그리고 대성동 신리골 한마을 신자이기도 한 정문호 손선지 한원서 등 7명은 12월 3일과 5일에 각각 체포돼 한 감옥에 구속됐다.

이들은 감옥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시처럼 기도와 묵상을 계속하면서「신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으며 배교를 호소하는 주위의 애원을 그리스도께 맡기면서 영생을 기원, 조화서의 아들 윤호를 제외한 6명 전원은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장렬하게 망나니의 칼을 받았다.

조윤호는 아버지와 아들을 한날 한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열흘후인 12월 23일 서천교 밑에서 장하 치명했다.

이들의 시체는 숲정이 건너편 부응바위(범바위) 밑 도랑가에 묻혔는데 손선지 정문호 한원서의 시신도 손선지의 아들 요한에 의해 이듬해 정월 그믐 고산으로 이장됐고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는 치명일기 발간 후 보충 증언한 오순보의 아버지 오사현에 의해 1867년 2월 초순 현재의 완주군 오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이장됐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생명을 낳는다는 소박한 진리를 죽음으로 증거한 이들의 정신은, 그러나 아버지의 영생의 약속처럼 믿음의 꽃으로 활짝 피어 교회사 안에 살아 있다.

순교자들의 피로 다져진 숲정이-. 1960년 2학급으로 시작, 지금은 미래교회와 사회의 주역을 맡게 될 청소년들이 티 없이 뛰어 놀고 있는 해성학교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만 운동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현양탑은 아직도 그때의 그 꿋꿋했던 선조들의 기개를 말해주는듯 우뚝 솟아있다.

이명서의 손자 이준명(아나톨)과 이춘화가 1935년 조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십자비석 옆에 1968년 10월 6일 시복을 기해 전주교민의 힘을 합해 순교선열들에 바친 현양탑 앞에는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기도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저들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우리는 바라고 바라던 때를 맞이하였습니다/상심하거나 실망하는 일없이/기쁜 마음으로/우리의 신앙을 증거하기위해 순교합니다/아버지/저들을 하루속히 성인품에 올려주십시요』이제 시성을 눈앞에 둔 숲정이 순교복자들은 다음과 같다.

▲1866년 순교ㆍ1968년 시복(괄호 안은 세례명ㆍ순교당시나이)=조화서(베드로ㆍ52) 손선지(베드로ㆍ47) 이영서(베드로ㆍ46) 한원서(베드로ㆍ31) 정원지(베드로ㆍ21) 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66)

윤강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