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35. 대구 주교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9-18 제 137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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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첫 미사-64년 화재당해
새 양식건축술 선보인 4층 건물
1913년 12월 22일 경남지방 사목순방을 마치고 환차(還次)하신 플로리안ㆍ드망즈(安世華) 주교가 이날 저녁 바로 신축 건물로 드시어 다음날인 12월 23일 아침 새 건물 중앙 현관(玄關) 위층에 꾸며진 소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주교의 거처며、교구청사(敎區廳舍)가 된「조선남방 천주교관리소」(天主敎管理所)는 대구읍(邑)의 남쪽에 위치한 서상면(西上面) 남산리(南山里) 앞고개「화원」(花園=徐視察種苗園)안 제일 높은 전망 좋은 자리에 북향으로 읍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졌는데、이로써 주교좌성당이 서울 종현(鍾峴=明洞)처럼 높은 지대에 덩그렇게 건립되지는 못했어도 1891년「새방골」에서 대구읍내로 진출한 대구 본당 첫 주임 바오로ㆍ로베르(金保祿) 신부가 영구적 본당터전을 잡을 때 계산동 서편의 동산(東山) 전체를 150양(兩)에 매입하기로 하였다가 완고한 몇몇 노인들의 반대 때문에 동산 위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고 그 아래 평지에 주저앉게 된 여한을 22년 훗날인 이제 소원의 일부를 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흐뭇한 일이었다.

신축된 주교관은 서울 주교관(現 사도회관)과 거의 같은 규모였지만 반지하(半地下)로 된 1층(90坪2合)과、현관과 사무처 응접실 및 회의실ㆍ식당 등이 있는 2층(90평 2합)과、주교거실과 성당 및 객실(4)이 있는 3층(90평 2합)과、보관서류와 기물을 간직하는 다락방까지 모두 4층인 셈인데 붉은 벽돌과 회색벽돌ㆍ화강석으로 쌓고 지붕은 합석스레트로 덮은 쓸모 있고 짜임새 멋있는 설계의 건물로 당시 영남지방에 건립된 서양식 건축 가운데서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 건물이다. 이 집은 1964년 12월 14일 새벽 화재로 인해 헐리게 될 때까지 51년간「조선남방교구」대구대목구(代牧區)로 이어지는 역대 주교 교구장 대주교 7위가 대를 계승、교구를 사목하던 본산(本山)이었고 교회역사의 산실(産室)이기도 했으며 우리 민족의 애환(哀歡) 반세기 이상의 격동기를 말없이 지켜보기도 했다.

이 건물이 세워질 당시의 대구인구는 2만 8~9천명. 계산동 성당에서 앞고개「화원」으로 가는 길은 달구지(牛馬車) 한 대가 일방 통행할 수 있는 길폭의 오르막길이었으므로 재목이나 건축자재의 운반이 큰 어려움이었다.

벽돌은 공사현장 부근에 벽돌 굽는 굴과 공장을 마련해야 했으며 요즈음처럼 시멘트도 없었다.

건축 기술자는 모두 청국인(中國人)들이었는데 그 대표자는 강의관(姜義寬ㆍ프란치스꼬)였다. 당시 식수(食水)공급을 위한 대구의 상수도시설은 1912년부터 4개년 계획사업으로 계획은 세워졌으나 아직 착공하기 전(1914년 7월 着工)이어서 건축에 앞서 샘부터 파야했으므로 높은 언덕지대에서 깊이 수십미터되는 샘을 청석과 바위를 뚫으며 물이 샘솟을 때까지 파내려가야 했는데 상당한 깊이를 파내려갔는데도 물이 나지 않아 특별기구(9일 기도)를 계속하고 있던 어느 날 물이 쾅쾅 솟아올라 모두 감사의 환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샘은 그 둘레위에 건물이 서게 되어 건물 안에 들게 되고 샘이 있는 간은 식간(취사장)이 되었고 손으로 돌리는 기계장치로 물을 퍼 올렸으며 물맛 좋고 여름철 어떤 긴 가뭄에도 물이 딸리는 일이 없었다.

주교관을 정점으로 그 아래 북쪽 서시찰 재실이 있던(現大建校圖書館)데서 남쪽으로는 1914년「성유스띠노신학교」가 건립되고 앞 고갯길 서편 언덕 위에는 1915년「샬뜨르성바오로회 수녀원」이 신축됨으로써 메마른 언덕바지 앞 고개에 신자들 집이 여러 세대 이사 와서 새 마을이 이뤄지고 앞서 건립된「명도회관」과 함께 교회의 주요시설이 모두 한 곳에 집중되어 앞 고개는 대구 가톨릭의 성역(聖域)으로 면모가 바꿔지게 되었다.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