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복음해설] 130. 하느님은 자비하신데 너희는 무자비하구나!/김구인 신부

김구인 신부ㆍ요한보스꼬ㆍ베네딕또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9-11 제 137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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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루까15장1~32절)
율법주의적 고집에서 벗어나
이땅 위에 용서와 평화 심어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신 그리스도
무자비한 세상이다. 대한항공기의 격추사건은 그 내용이 어떻든 무자비한 세상임을 실감케 한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내가 속한 집단의 안전과 나만을 생각하다보면 이런 무자비가 드러나게 된다.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살려면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아가서 단정한 사람들、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율법주의와 엄격함이 용서할 줄 모르는 외고집을 낳아 정의만을 내세우다 보면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죽게 된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늘 주일복음 가운데 비유의 말씀은 한량없는 사랑을 지니신 어진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드러내 주시고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한편 잃었던 양 한 마리、잃었던 은전 한 닢 그리고 잃었던 아들을 찾은 착한 목자와 가난한 여자 그리고 어진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찾는다면 또 다른 큰 사실을 오늘 복음 중에서 발견하게 된다. 상황을 보자『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그런데『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이것이 이 비유들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게 된 이유이다. 세 가지 비유 끝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착한 목자는『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자、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하며 좋아할 것이다』가난한 그 여자는『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자、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그리고 어진 아버지는『네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잃었던 것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고자한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바로 잃었던 사람을 찾는 것이요、떠났던 아들이 돌아온 것은 죽었던 아들이 살아온 것이 된다.

이것을 하느님이 기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권위 있고 단정하고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단죄해버리는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고 음식까지 함께 나누신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바이고 그래서 나는 그분처럼 기쁘기 한량없다. 그러니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함께 기쁨을 나누자는 초대가 된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못마땅해 하였다」. 묘하게도 셋째 비유의 큰 아들의 태도는 그들과 비슷하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투덜거렸다』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잃은 자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토록 크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너희들은 기쁨도 사랑도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스스로 의인으로만 자처하고 있구나! 무자비하구나 길 잃은 양이 목자를 찾았고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왔으니 같이 기뻐하자는 말씀이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도 복음을、당신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초대하신다.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큰 아들에게 말하는 어진 아버지의 말로써 예수께서는 그들도 버리지 않으시고 격려하신다. 큰 아들을「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자기를 떠난 작은 아들을 그 무례나 배신은 생각지 않고 기다리다가 최상의 대우로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무자비한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용서와 평화를 심자! 독선과 무자비가 사라질 때까지.

김구인 신부ㆍ요한보스꼬ㆍ베네딕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