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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 교회 근세사] 32. 영남의 옛본당들 5. 김천본당

해설 사진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7-10 제 13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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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본당소속서 1901년 본당승격
황금동에 와가 성당ㆍ성의학교 세워
피난신자들 오가던 길목-180년경 마잠공소 설립
드망즈(安) 주교가 부산포 본당을 사목순시중이던 1912년 1월 18일 저녁 7시 대구에서 교구당가(경리부장) 뭇세(文濟萬) 신부가 주교께 품의할 일이 있어 초량성당에 왔으므로 1월 20일 주교와 동행, 경부선 상행열차를 타게 되었는데 대구역에서는 뭇세(文) 신부만 하차하고 주교와 김 야고보 복사는 대구를 거쳐 김천에서 하차하여 김천본당 제2대주임 김문옥(金紋玉=요셉) 신부의 영접을 받으며 별동(鱉洞=黃金洞)에 자리잡은 김천성당(金山郡金泉面鱉洞 天主堂)에 도착하였다.

경상북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대구와 대전사이의 중간지점이며 동북으론 문경과 상주,동남으론 성주와 진주,서쪽으론 무주와 거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김천땅은 옛날 감문소국(甘文高小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 개녕(開寧)으로 그후 금산군(金山郡)으로,또 1914년에는개녕ㆍ금산ㆍ지례(知禮)및 성주(星州)군의 용산면(龍山面)과 신곡면(新谷面)을 변합해 김천군(金泉郡)이 되었다.

동쪽과 남북에 해발9백77m의 금오산과 연결된 백마산 효산봉이 있고 대덕산과 그 계곡을 따라 지례(知禮)로부터 북으로 흐르는 감천(甘川)과 서북으로 고성산(高城山)황악산(黃樂山)이 추풍령과 이어져 여기서 동으로 흐르는 직지천(直指川)이 함류해서 낙동강지류가 되고 감천과 직지천으로 형성된 평야는 비옥한 농토이며『신기한 생이 있어 금을 토했다』는 절설로 땅이름이『금이나온 샘』(金泉)으로된 곳이다.

이지방에 복음의 씨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수없으나 박해시대 신자들의 이동이 잦았던때 교통의 요지였던 이 곳은 또한 피난신자들의 오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며 그래서 병인대교난 10년후 전교신부들이 재입국하기 6년전인 1870년경 이지방「마잠」(甘川面 智佐洞)에는 교우집이 있었고 첫 신자들로 알려진 권베드로(權奉一)회장과 이요한(李榮辛)박니고나오(朴致道)회장등이 열심히 기쁜 소식을 전파하여 마잠공소를 이룩하였다.1890년대초부터 전교신부들의 순회지방이 되었다가,1894년 칠곡 가실(洛山)본당의 설정과 함께「가실」에 속한 전교지역이었으며,1901년 김천본당으로 승격돼 가실(洛山)본당 제2대 주임으로 이지방 전교도 말았던 김성학(金聖學=알렉시오)신부가 첫 본당신부로 부임함으로써 가톨릭신앙은 이고장의 신문화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897년용산신학교 제2회 졸업반으로 한기근(韓基根=바오로)이내수 아우구스띠노)신부와 같이 사제로 서품된 김알렉시오신부는 김천에 부임하여 본당위치를 중심지대(별동=황금동)에정하고 훌륭한 기와집성당과 학교건물을 신축하고「성의학교」(聖義學校)를 설립,개교하였는데 학제(學制)는 초등과4년ㆍ고등과 4년이었다.

1911년 남방교구(大邱代牧區)가 설정되고 성직자들의 인사이동이 있을때 알렉시오 김신부는 경성교구(京城=서울)소속으로 되어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전임되고 1900년 9월22일 김양흥(金양흥=스떼파노)김승연(金承淵=아우구스띠노)신부와 같이 서품된 경상도출신 김요셉(金紋玉)신부가 제2대 김천본당 신부로 부임한것이다.이때 김천본당 교세는 신자총수 1천7백75명이며 소속공소는 35개처나 되었다.

해설 사진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