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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님을 증거했다 - 시복후보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 이승훈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26 제 136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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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첫 영세자
천주교회를 이 땅에 처음으로 세운 우리 동방국의 베드로 이승훈은 강원도 평참에 본관을 두었던 참판 이동욱의 맏아들로 1766년 한성부 서부 반석정에서 태어났다.

이승훈은 1783년 겨울에 아버지가 동지사의 서관장이 되어 북경으로 갈 때 이벽의 권유로 그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됐다.

이승훈은 북경의 구베 아주교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고 1784년 봄에 많은 책과 십자고상, 상본과 성물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훈은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이들은 권철신 형제와 이승훈의 처남들인 정약종, 약전, 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들에게 세례를 주어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렇게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임시 준성직 제도의 자치 교회를 설립했으나 교리 지식의 부족으로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지도급 신자들이 미사 봉헌, 고백 성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교리에 어긋난 성직 수행을 중단하고 그해10월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어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 함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들은 북경에 정식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요청,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에 힘쓴 결과 1800년까지에는 나날이 교유들의 수가 붙어 났다.

이러한 때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김대비 정순 왕비가 수렴 청정하여 1801년 신유교난을 일으켜 천주교인을 마구 잡아 죽였다.

이승훈도 이때 잡혀 1801년 2월24일 서소 문밖 네거리에서 순교 했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시신은 며칠 후 자손들이 몰래 거두어 고향인 인천 만수리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