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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님을 증거했다 - 시복후보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 최창현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19 제 136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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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중에도 십계명 강해
관천 최창현은 영조35년(1759년) 한양 초전골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중인의 신분에 속했으나 어릴 적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조용하고 슬기로운 성품을 지닌 최창현은 이벽ㆍ정약종 등과 가까이 하면서 천주교의 진리에 접하게 됐다. 약국을 운영하는 집안에 드나드는 여러 사람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줬던 그는 황사영의 백서에도 나타날 만큼 커다란 지도적 역량을 발휘했다. 이벽 등이 가성직 조직을 이룰 때 신부로 선임된 바 있는 최창현은 높은 덕망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그의 겸손과 순명은 최창현으로 하여금 성직자 영입이 이루어진 뒤 총회 장직을 맡게끔했다.

또한 최창현은 책을 베끼는 일에 능숙하여 많은 교리서를 베껴 교인들에게 유포, 하느님 사업에 공헌하기도 했다.

자기의 신앙을 남에게 나누어주기에 정성을 다해 온 최창현도 역시 거센 박해의 물결에 휘말려 1801년 병을 앓고 있던 중 배교자 김여삼의 안내로 체포됐다.

극심한 고문에도 끝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한 그는 매질로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옥리들에게 십계명을 강(講)할 만큼 확고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나라 초창기 교회의 지도적 교인답게, 교인들을 돌보는 총회장답게 신앙의 모범을 보인 최창현은 1801년 4월8일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과 같이 서소문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