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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30. 영남의 옛 본당들 3. 마산포본당

해설·사진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19 제 136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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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경남지역 전교 활동의 중심지
부산본당 공소서 1901년 본당 승격
1912년 1월 8일 염천 용평(永川龍坪), 본당 초도순시를 끝내고 대구로 환당하신 드망즈(安世華) 주교는 1월 9일 경남의 둘째 본당인 마산포본당(馬山府外面玩月里 天主堂)으로 가기 위해 김 야고보(金永垠) 복사를 대동하고 대구역(驛)에서 경부선 하행 철마(鐵馬)를 탔다. 도중 삼랑진역에서 내려 마산행 열차로 옮겨 타고 이날 오후 종착역 신마산에 도착했는데 당시 호남선 철도는 완전 개통이 안 되었지만 경부선의 삼랑진-마산간의 철도는 부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교 일행은 마산포(馬山浦)본당 제3대주임 까넬(M.Canelle 簡弘模) 신부와 신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무학산(舞鶴山) 중허리에 자리 잡은 완월리 206번지의 본당에서 역장을 풀었다.

한반도(韓半島)의 동남단 부산과 진주(晉州)사이의 중간 지점, 마산은 옛날 신라 때는 골포(骨浦)또는 합포(合浦)라 했으며 이조(李朝)시대 서울에 조공미를 보내기 위한 조창(漕倉)이 남성동(南城洞)에 설치되면서 부근 동성리ㆍ중성리 등 7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마산의 기반이 이룩되었다 한다.

서쪽과 남쪽과 북쪽 3면이 무학산(舞鶴山)을 주봉으로 하는 작은 산악으로 둘러싸였고 항구앞 바다인 합포만(合浦灣) 어귀에는 돌섬(猪島)이 가로놓여 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항구로서의 자연조건이 고루 갖추어진 좋은 포구이다 .

1899년 5월 1일 개항(開港)되고「국가거류지제」가 실시되면서 일본 영사관(領事館) 이 설치되고, 1909년에는 부청(府廳)이 설치되었다 .

처음(1886년 이후) 대구본당(신나무골 시대)공소로, 그 다음(1890년 이후)은 부산 본당 관하의 공소였던 미산 지방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01년이며 첫 본당 신부는 부산 본당 제3대주임이던 에밀리오 따께(EㆍTAQUET 嚴宅基) 신부이다.

경남 본당격인 부산 본당 신부의 전교 지역은 동래 울상 기장 양산 밀양 김해 진영 진주 고성 함안 마산 통영 거제도 등 경상남도 전역이었다. 또 그 당시는 경상남도 관찰사(도지사)가 진주에 주재하고 있었으므로 행정 수도(行政首都)는 진주였기 때문에 진주의 신자들은『경남본당은 진주에 설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1898년에는 양산 공소 회장을 비롯한 삼가 ㆍ곤양 장재실ㆍ소촌(文山) 원당성ㆍ원당 등 11개 공소 회장들이 연서로 서울 뮈뗄(閔德孝) 주교께 신부 한 분을 더 파견해 주시기를 요청했던 것이며 따께(엄) 신부도 주교계『부산엔 다른 신부를 보내 주시고 전교하기가 어려운 진주에는 자기가 가겠다.』고 자원했었다.

그리하여 따께(엄) 신부는 진주 배나무 골에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전교를 계획했으나 지방 관헌들과 부랑배들의 집회 방해 등 박해로 변두리 지대인 비라실(長在里)로 옮겼다가 1901년 마산으로 전임하므로써 마산 본당이 설립된 것이다.

마산 본당을 설립한 따께(엄)신부는 1902년 제주도에서 신축(辛丑)교난을 겪은 제르만ㆍ뮈세(G.Mousset 文濟萬) 신부가 제2재 마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9년간 마산을 중심으로한 서부 경남 각 지방에 전교를 하다가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교구 경리 부장으로 전임되고 제3대 주임으로 까넬(簡) 신부가 부임하게 된 것이다.

1910년의 마산본당 교세는 신자 총 수 1천4백44명 공소 24개처이며 교육기관은 성지 학교(聖旨學校)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학제는 유치과(幼稚科) 2년ㆍ심상과(尋常科)3년ㆍ고등과 1년으로 되어 있었다.

해설·사진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