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청소년 문제의 실상 - 상담사례를 통해알아본다] 52. 지켜야만되는 약속/조순애

조순애 시인ㆍ선일여고 교사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12 제 135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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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불화로 가출한 엄마
약속깨진 상처 누가 치료하나

설희는 울고 있었다.

수화기를 든 채 공중 전화대 앞에서 울고 있었다. 창피할 텐데 그 아이는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었다.

예감이 이상해서 설희는 집에 전화를 했는데 설희의 어머니가 끝내 옷가지를 챙겨서는 가 버린 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단은 고부간의 갈등이었다. 정확하게 진단하면 무남독녀인 설희의 유강을 놓고 시비가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설희의 출생 직후였다.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되었다.

기저귀를 채우는 일, 우유를 먹이는 일등 시비가 안되는 게 없었다. 설희가 돌이만 지난 봄날 수도를 앓을 때 병원으로 달려가려는 엄마를 할머니는 제지했다. 따지고 보면 설희를 위해서였다지만 결과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설희를 데리고 누가 가느냐, 어떤 옷을 입혀서 가느냐 하찮은 일인데도 두 여인은 버티기 일쑤였다.

설희가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설희 엄마는 두 번을 가정을 떠나기까지 했다.

『저는 할머니도 좋고 엄마도 좋아요. 그런데 그 두 분과 함께 있을 때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설희 아버지의 부정한 행동이 드러나고 갑자기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어제 밤 설희 엄마는 설희 방에서 울면서 말했다.

『너도 컸으니까 이 엄마를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설희는 엄마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한 어른스런 소리를 했다. 그리고 애원했다.

『엄마는 어제 밤에 한 저와의 약속을 깨 버리신 거예요.』아침에 인사하고 등교했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설희가 있는 이집을 떠나지 않기로 굳게굳게 다짐했던 엄마가 떠난 사실을 설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이 깨어 졌을 때 얼마나 황폐함을 느낍니까?

나는 당신을 믿었는데 그가 나를 좌절시켰다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얼마나 실망합니까? 그리고 아픔을 느낍니까?…』

설희의 울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설희가 믿고 의지하는 그 어머니와의 약속이 깨진 상처를 어찌 치료할 것인가?

우리는 가끔 깨진 약속 때문에 좌절하고 분노한다. 설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어머니부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공중전화를 가지고는 상담이 될 수가 없었다.

가정 환경 탓인지 설희는 어른스럽다기보다는 그 나이 또래의 발랄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설희의 엄마로 하여금 집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한 절실한 사연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설희와의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지 않았을까

엄마의 가출을 호소한 소녀들은 하나같이 그리움을 호소하면서도 그 엄마가 취한 행동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학교에 책가방을 놔둔 채로 뛰쳐나왔던 것을 후회하게 된 설희에게, 어른들도 후회가 될 일을 저지르게 되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른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는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설희가 그 엄마를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어른들은 치사하고 비겁한 데가 있기 마련이라는 얘기로 이끌 수는 없었다.

엄마가 안계시지만 학교에도 잘 다니고 행복하게 살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희의 세 번째 전화에서(그때는 외가집에서 건 전화였음) 설희는 엄마와 좀 만나 줄 수가 없느냐고 아주 조심스런 제안을 해 왔다.

설희가 그 엄마를 치료하고자 나섰다고도 볼 수가 있는 한 마디가 아닌가. 설희는 좌절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넘어진 그의 엄마를 일으키려는 아이다. 지켜야만 되는 약속을 어른 위주로 깨는 건 얼마나 위험한 관계로 몰고가는 걸까.

그러나 설희는 계속해서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 엄마가 쉽게 돌아오지 않는 한.

「문제아 뒤에 문제 부모들」이란 제목은 꾸준히 존재해야만 하나? (계속)

조순애 시인ㆍ선일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