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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 교회 근세사] 29. 영남의 옛 본당들 2. 진주문산

글ㆍ사진 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12 제 135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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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 대교 난 이전부터 교우촌 형성
경남에서 가장 활기찬 본당
개화와 신문화의 선두 주자
드망즈(安世華) 주교는 1912년 1월 12일 마산(馬山)에서 120리 거리의 서남쪽에 있는 경남의 셋째 본당 진주 문산(晉州文山)본당(晉州郡 文山面蘇文里 天主堂)을 순방하기 위해 말을 타고 마산 본당을 출발했는데 당시는 진주선(馬山-晉州) 철도가 아직 부설되지 않았던 때였다. 주교 일행은 까넬(簡=마산 본당) 신부와 주교영접차 마산에 온 김 베드로(金命濟=文山본당) 신부와 김 야고보(金永垠) 주교 비서 등이었다.『역에 나무 그늘 짙고 간수(澗水) 흐르는데 오래 나그네 몸 고달파 잠깐 머문다. 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 강위 인가에 죽루(竹樓)가 있네.』라고 옛사람이 노래 한 소촌역(召村驛)인 경남 진양(晉陽)군 문산(文山)은 진주읍 동쪽 24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구5천여 명(1912년 당시)의 큰 농촌이다.

이 순박하고 근검한 땅에 그리스도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병인년(1866) 이전에 함안(咸安)에서 이곳에 이주해 온 구한선(다두)씨가 열성적인 전교를 함으로써 비롯됐는데 구다두씨는 부친 구필경이 문산에 살던 강문주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있는 곳에 자주 가서 지내던 중 전라도「달구산」에서 이사해 온 최누수와 친하게 되어 그의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고 함안 본가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며, 한편 병인대교난에 이르기까지 혹심한 박해를 피해서 숨어 다니던 호남지방 신자들이 인접지인 서부 경남의 함양(咸陽) 진주(晉州) 고성(固城)등지로 숨어들게 되고 또 이들 중 일부는 이름나지 않은 문산으로도 이주하게 되었으므로 소촌(召村)은 일찍부터 전교 신부들의 순회 전교 지방이 되어 두세(E.C.Douce 丁加彌) 로베르(A.P.Robert金保祿) 조조(M.Jozeau趙得夏) 우도(P.Oudot吳保祿) 따께(E.Taguet嚴宅基) 뭇세(G.Mousset 文濟萬) 등 빠리 외방 전교 회원 선교사들의 보살핌 가운데 풍성한 결실을 맺은 공소로서 1905년 경남지방 세 번째의 본당으로 승격이 되어 그 해 6월 15일 입국한 마리오ㆍ율리엥(M.Julien權裕良) 신부가 첫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는데 삼곡리(三谷里)에 초가3동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성당 신축을 준비하다가 2년 후 소문리(蘇文里)에 2천4백 여평 부지에 기와집 10여동이 있는 옛 관아 건물을 매입하게 되어 문산 천주교회는 이 고장에서 복음 전파와 아울러 개화와 신문화의 주도자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08년 율리엥(權) 신부는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그해에 새로 서품된 김명제(베드로)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심상과(尋當科)4년 고등과 3년제의「배명(培明)학교」를 설립 개교하여 지방 개화와 신문화 보급에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사회 각 계층에 교회를 알리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일소케 하였다.「배명 학교」는 서부 경남 일대에 사립학교의 시조(始祖)였던 만큼 멀리 통영ㆍ거제ㆍ사천ㆍ곤양ㆍ함안ㆍ삼가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고 면(面)내의 각 글방(書堂)에서 상투를 튼 갓 쓴 학생도 많이 있었으며 당시에 양악기(洋樂器)도 있는 신 교육 기관으로 학생 수는 1백50명, 그 시대의 학교로는 상당히 큰 학교급에 드는 것이다.

김 신부는 부지런하고 정열적인 성품이어서 기도 시간 외에는 언제나 노동을 했는데 밤에는 부녀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당신이 직접 교편을 잡고, 성가까지 가르쳤고 낮에는 목수도 되고 미장이도 되고 땅을 파고 담을 쌓는 일을 몸소 했으며, 일거리가 없으면 일거리를 일부러 만들어서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김 신부에 대한 칭송은 신자들에게서보다 외교인들 사이에서더 유명했다 한다.

1910년 진주 소촌(晉州文山)본당의 교세는 신자 총 수1천3백36명 공소31개소이다.

글ㆍ사진 제공=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