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성좌의 소리] 75. “예수의 죽음이 일치의 장애물 제거”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12 제 1359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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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반 알현서 행한 강론 요지
죄악은 필연적으로 인간 사이의 분열 초래
화해는 곧 신적일 치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다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년에 관한 특별 교육을 계속 해오고 있는 가운데 지난 5월 18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있은 수요 일반 알현에서 행한 강론 내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며 그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에페소 2장4ㆍ16)

사랑 하올 자녀 여러분, 지금은 5월이며 마돈나의 계절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우리들 간에 이룩해 놓으신 화해의 깊이를 보다 잘 깨달을수 있읍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드러나는 예수님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버지께 대한 선한 마음과 친절함의 표시를 가져다줍니다. 더욱이 이사랑은 우리에게 화해의 관심사와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일치의 어머니이시며 또한 그분은 자녀들을 일치시키는 일이나 또는 그들이 서로 가까워지는 일이면 무엇이나 믿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열매들을 생각해볼 때 두 종류의 화해 곧 인간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연결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바로 그 사실은 또한 모든 사람이 서로 간에 화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서적 계시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는 죄악은 필연적이고 부수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적대심이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게 될 때 그 적대심은 동료 인간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게 합니다. 성서는 바벨탑을 통해 이 같은 전도(轉倒)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탑을 세우려 결정했을 때 곧 탑을 세움으로써 하느님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자기네끼리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창세기11장1~9)분열의 쓰라린 경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거역하고, 대항하려는 것은 사회 여러 관계 속에 분열과 바꿀 수 없는 긴장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됩니다.

반대로 죄인이 하느님과 화해하면 그 사람 안에는 자리 형제들과 화해하려는 충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인간의 두부류 곧 유태인과 외교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나의 몸과 새로운 인간이 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인간을 분리시킨 미움을 말살시키셨으며 한 성령을 통해 성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바치심으로써 사람들을 분리시킨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우리의 평화』(꼬린토후서 3장14절)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화해의 의미를 깨달으셨습니다. 개종하시기 전 그분은 유태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적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개심했을 때는 그 같은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이 교인들의 사도가 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보편 구제 설에 여하한 장애도 인정치 않았습니다.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을 때 그는 냉혹하게 그리스도교인을 박해했으며 개종 후에는 그전과 같은 열성으로 크리스찬 신앙을 전파하셨으며 국경 초월한 끝없는 사랑의 전달자였습니다. 그분이 설파하신『이제는 유태도 노예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3장28절)는 말씀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확실히 사람들 간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런 차이점들이 더 이상 분열의 동기가 될 수 없다는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모든 차이점을 자신 안에서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사도의 입장은 예수님의 생각을 완전히 반영 하는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길은 요한이 기록한 주님의『사제의 기도』를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기도는 중요한 내용들로 엮어져 있는 특별한 페이지입니다. 성부께 드리는 그 기도에서 그분은 성부와 자신이 하나인 것처럼 모두가 하나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요한17장21~22).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시는 일치의 완전한 모델을 지적하십니다.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위해 얻으셔야 할 화해는 단순히 존재하는 분열을 제거하고 일치를 다시 이루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적 위격의 일치를 인간 공동체와 소통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일치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해는 한때 잃어버렸던 일치를 회복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화해는 인간들 간의 일치를 신적 공동체 안에서 이루는 완전한 일치에 참여하는 단계로 향상시킵니다.

성서는 성령께서 이 모든 일에 역사하신 근본적인 역할을 우연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아버지와 아들을 인간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며 일치를 깨닫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치는 신적인 일치가 그 원천이며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구세주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설교하실 때 불목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화해를 이루어야 할 긴급한 의무를 수차 언급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기도의 불가피한 조건입니다. 곧 주께서는『제단에 제물을 바치러 가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마테오5장23ㆍ24)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화해하게 되는 일이 여러 번 자주 반복되고 또 화해를 깨뜨린 일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화해하려는 노력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주께로부터 받은 명령『일곱 번이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마테오18장22)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에 따라 그의 제자는 누구라도 용서하는 회수의 제한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화해를 이루는데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 구원을 위한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할 모든 필요한 힘을 얻으셨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자기 이웃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곧 십자가는 인간이 상호간에 마음의 문을 닫게 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시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