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28. 영남의 옛 본당들 1. 영천 용평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5-29 제 1357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영천용평 1907년 공소서 본당으로 승격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 이룬 신자촌

주교로 부임한 지 75일 만에 2개월 동안 호남과 제주도 지방의 본당들을 첫 사목 순방(司 牧巡訪)한 조선 남방(朝鮮南方)교구 감목 플로리안ㆍ드망즈(安世華) 주교는 부임 후 여섯 달 아흐레(9日)가 되는 1912년 1월 5일부터 24일까지 20일간에 대구를 제외한 연남 지방 6개본당을 초도(初度)순시하였다.

대구에서 경주와 포항을 연결하는 철도가 아직 부설되지 않았고, 자동차가 달릴수 있는 도롣 없었던 때였으므로 주교님과 김야보고(金永垠)복사는 말(당나귀)을 타고 1월 5일 아침 대구 계산동 입시 주교관을 출발, 하향(河陽) 와촌(瓦村) 청통(淸通)을 거쳐 용평(龍坪)에 이르는 80리길을 달려 이날 오후 영천 신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천(永川)용평본당(永川郡 거림면 龍坪洞 天主堂)에 도착하였다.

대구에서 동(東)으로 38km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영천은 옛날 임고(臨皐)영주(永州)라 했고 이주(李朝)에 이르러 영천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둘레가 산악(山嶽)으로 싸여 동쪽은 태백산맥의 말선(末線)에 의해 영일(迎日) 월성(月城) 과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 은 팔공산(八公山)을 사이에 두고 귄위(軍威) 경산(慶山)에 접경(接境) 하고 남쪽은 청도(淸道)에 접하고 북쪽은 보현산(普賢山)과 화산(華山)에 의하여 청송(靑松)과 접경하고 있는 영천은 천연 수리(天然水利)가 풍부함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역사상 이름 있는 인재도 많이 배출하였다.

대원산(大元山)을 끼고 화산강(花山江)이 구비 돌아 흐르고 있는 이곳 용평리는 영천지 방 가톨릭교회의 터전을 마련한 큰 역할을 하였으니 1907년 5월 30일 용평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영천 지방이 고향인 김승연(金承淵〓아우수스띠노)신부가 첫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영천 본당 복음의 씨가 처음 떨어진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정확한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지일(芝日) 이라 불리운 대창면(大昌面) 신광동(新光洞)에서 깊은 산골로 10리를 더 들어가면 구룡(九龍)이라는 곳이 있는데 월성군 산내면(慶州山內)과 청도군과 영천군의 경계 지점이 되어 있는 구룡 산골에는 옛날 교난 시대(敎難時代)에 피신하여 숨어살고 있던 순교자들의 후손 몇 집안들이 있었으며 1893년 김태호(金太鎬〓프란치스꼬)라는 이가 석촌동(石村洞)에서 용평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자기 집을 공소(公所)로 하여 신자들 을 모으는 한편 당시 대구 읍 성 밖「대어벌」(待御伐〓현 壽昌洞과 仁橋洞)의 정승지(鄭圭鈺〓바오로) 집을 임시 성당으로 경상 지방의 포교를 담당하고 있던 로베르(AㆍPㆍRobert 金保祿)신부에게 성사톨 받아 왔는데 1898년경에는 영천 지방「가실」(落山)본당 소속이 되어 가실 본당 제3대주임 알퐁소ㆍ조요(AㆍJoyau 玉祿雅)신부가 자주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1900년 9월에 사제 서품되어 전북 정읍(全北井邑)의 첫 본당 신부였던 김 신부는 용평본당으로 부임하자 즉시 성당과 사제관 신축의 큰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몸소 노동함으로써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신자들의 열성을 배로 분발케 해서 공사는 쉽게 완공되었으며 또 글방(書堂)을 개설하였다. 이리하여 약1백호가 되는 교우들이 한동리에 성당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뿐만 아니라 교육과 노동의 친목의 중심이 되어 평화로운 이상촌(理想村)을 이룬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였다.

드망즈(安) 주교는 3일 간 머무르시며 견진성사도 주셨는데 이때 영천 지방의 교세는 16개처 공소가 있었고 신자 수는 8백40여 명이었다. 주교 일행은 1월 8일 대구로 환당(還堂)하였다.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