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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26. 호남의 본당들 6. 목포·제주도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5-01 제 135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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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구 모체된 전남의 첫 본당 목포
제주도 제주 읍내와 서귀포에 2개 본당
안 필노리아노 (F.Demange 安世華) 주교와 복사 (秘書) 김 야고보(金永垠) 일행은 다음 순방지인 목포 (木浦) 를 향해 10월 15일 (1911년) 전라남도에서 둘째 번의 본당이던 노안(羅州老安)을 출발, 영산포 (榮山浦)로 가서 이날 저녁 9시 출항하는 영산환 (榮山丸) 배로 밤새도록 항해하고 다음날인 10월 16일 오후 3시에 목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배에 오른 지 20여 시간의 지루하고 고생스런 뱃길이었다.

목포항 부두에는 목포본당 제2대주임 위돌 (V.Tourneux 呂東宣) 신부와 신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목포본당 (務安郡二老面蓮洞 木浦天主堂)은 목포항이 개항(開港)된 1897년에 설정되어 전라남도에서는 첫 본당이며, 훗날 광주교구의 모체 (母體)가 된 심장부이다. 안주교의 순시 당시 목포본당은 17개소 공소에 신자 수 9백16명이었다.

(목포본당 연혁 (沿革) 은 본란 제12회「목포 산정동聖堂」 1982년 9월 12일字 참조)

주교 일행은 목포 순방을 마치고 제주도 (濟州島) 로 가기 위해 1911년 10월 19일 목포항에서「미우라마루」(三浦丸)라는 제주행 배를 타게 되었는데 하오 5시에 승선했으나, 4시간을 기다려 밤 9시에 출항하여 20일 정오에 제주에 상륙하게 되었다. 라끄루 (M.Lacrouts 具瑪琵) 신부와 신자들의 마중과 안내를 받으며 주교 일행은 제주읍성당(濟州島濟州面三徒里 濟州邑天主堂)에서 여장을 풀었다.

제주도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9년 뮈델(閔德孝) 주교가 뻬네 (C.pe-net 襄加菉}) 신부를 파견하고 제주읍본당과「한논」(西蹄面好近里) 본당을 설정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 크고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섬사람들의『너무 특수하고 어려운 성격과 관습 (慣習)』때문이었다.

즉 제주 도민들의 성격은 외국인들을 대단히 경계하였고 무엇보다도 미신적이었고, 합법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드물었다고 선교사들은 보고하였는데, 한 예를 들면 한때 이 섬에서 전도를 시도한 바 있는 미국인 목사들은 섬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보려는 궁여지책에서 개종자들에게 매달 1백냥씩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01(대한 光武5)년 이른바「신축(辛丑)제주 교난」의 끔직한 수난을 겪은 후 10년이 지난 이때 (1911년) 의 제주도 교회는 북 제주인 제주읍과 남 제주인 서홍리 (濟州島 古面西홍里) 에 본당이 있고 제주읍 본당은「신축 교난」을 몸소 겪은 말셀노ㆍ라끄루 (具瑪琵) 신부가 사목을 맡아 있고, 남제주 본당인 서홍리 (西홍里) 에는 유명한 식물학자로서 우리나라 식물학계에 큰 공헌을 한 에밀ㆍ따게 (Emilius Tagㆍet 嚴宅基)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제주교회에 다시 부임한 라끄루 (具) 신부는 교회 부흥에 전력을 기울이며 도민 계몽을 위해 4년제「신성 (晨星)학교」를 설립하여 본당에서 경영하였다.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