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청소년 문제의 실상 - 상담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49. 59명이 한 장에 쓴 편지/조순애

조순애 ㆍ시인ㆍ선일여고 교사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4-24 제 135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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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엄마」로 받아들인 학생
학급생 전원이 카드한장에 쓴 편지 졸업식날 전해와
“뚜렷한 목표 아래 열심히 살길”
흔히 학생들은 긴 얘기를 듣게 되면 지루해 한다. 더구나 종업식을 끝내는 마당에 중언부언 되풀이 하는 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학급아이들이 날더러 노래를 하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담임의 노래를 들어 보겠다는 바람에 응락했다.

『이 노래는 여러분도 잘 아는 노래지요. 역시 내가 학생일 때 어느 선생님이 부르신 건데, 우리와 헤어지면서 주관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가사의 내용에「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들 같아서, 조심스럽고 좀 불안하고 그런 어버이의 심정으로 나도 부르지요. 부디 뚜렷한 목표를 잊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서두가 좀 길지만 나는 명분을 얘기하고 나서「반달」을 정중하게 불렀다. 내 학급 아이들 59명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내 눈길과 손길을 나누어 주는 감정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또한 정중하게 들어주었다.

준법정신이 흐린 옥자, 괜시리 남학생들과 어수선하게 교제를 가져서 부모를 놀라게 했던 기숙이, 토요일 오후에 가출했다가 일요일 밤중에 아슬아슬하게 돌아온 명옥이, 일등 자리를 내놓고 조회 시간에 쓰러졌던 상희, 늦은 저녁 집으로 찾아와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숙자….나를 놀라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가슴을 조이게도 했던 아이들이 더 파고드는 아쉬움.

오빠 세 명이 번갈아 등록금을 내주어야 했던 조실부모한 인숙이는 눈자위가 빨갛다.

<내 사랑하는 딸들아>

수없이 가슴속에서 외쳐 대면서 노래를 불렀다.

『여러분들의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몇 명은 미납된 등록금 때문에 반 편성에서 누락된 사람이 있지만 우리 반에는 없어요. 다행입니다. 성적이 불량해서 유급되는 사람도 없어요. 기쁩니다.』 끝마치자 아이들은 내게 선물을 주었다. 카드와 함께.

카아네이션 그려진 커다란 카드를 들추자 깨알 박듯이 쓴 사랑의 글들이 눈에 꽉 차 왔다.

필체도 다르고 잉크 색도 다른 딸들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나를 자칭한 대명사는 거의가「엄마」라는 최대의 찬사였다.

59명이 몽땅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받아들인 기막힌 사랑이었다.

이렇게 착한 양떼일 뿐인 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어쩌랴.

가슴이 메어지고 말문이 막힌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고향의 봄」을 끝내고「사랑은 언제나」를 부르면서 다들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암 사랑 이구 말구.

미소를 짓자 아이들은 또 활짝 웃음을 되찾는다.

『선생님 찾아 되어도 되죠?』

『예쁘게 하구 와!』

신학기부터는 교복이 자율화니 멋 좀내 보려무나.

『편지 드릴게요.』

『요냐 주소를 정확하게 써라. 나도 답장을 할테니』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더 뚱뚱해지셔도 좋지만 건강하셔야 해요』

『너도, 밥 좀 많이 먹어라』

층계를 내려오면서 이 아들은 내 곁을 맴돈다.

섭섭한 이 마음.(계속)

조순애 ㆍ시인ㆍ선일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