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렇게 주님을 증거했다 - 시복후보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 주문모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4-24 제 1352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이 땅에 발딛은 첫 성직자 
1784년 이승훈 선생이 영세함으로써 시작된 한국 교회는 2년 만에 준 성직 제도의 자치 교회를 설립했으나, 교리지를 설립했으나. 교리 지식의 부족으로 지도급 신자들이 미사 봉헌ㆍ고백성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786년 교리에 어긋난 성직 수행을 중단하고 북경교구의 알렉산드르드 구베아 주교에게 자문을 구했다

북경의 구 주교는 한국 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교제 제도 설정과 평신도의 성무 집행을 엄하게 꾸짖었다.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한 우리 선조의 요청에 따라 이 땅에 첫발을 딛은 성직자가 바로 주문모(야고보) 신부였다.

1752년 중국 간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 신부는 북경교구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1794년 12월 23일 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이땅에 들어왔다.

이듬해 1월 한영에 임성하자 주 신부는 성무를 빨리 집행키 위해 한글을 배워 1795년 부활대축일 이 나라에서 첫 미사성제가 봉헌되도록 했다.

주 신부는 박해를 피해 강완속의 집으로 옮기면서도 끊임없는 열성과 놀라운 덕행으로 사목 행동을 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었다. 1801년 시작된 신유대 박해 때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가던 중 착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을 결심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자기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옥에 갇히고 말았다.

모진 신문에도 성직자로서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신자에게 불리한 말은 하진 않았던 주 신부는 참된 종교를 이 땅에 전하고 불쌍한 영혼을 전하고 불쌍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힘쓰다가 1801년 음력 4월 19일 50세를 일기로 새남터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