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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25. 호남의 본당들 5. 정읍 신성리 · 나주 노안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4-24 제 135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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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신성리 - 4가문 27명이 중심이 돼 태동
나주 노안 - 서울서 피난 온 한 교우가 전교 
1911년 10월 6일 수류(水流)를 떠나 정읍 (井邑)으로 향한 드망즈(安) 주교 일행은 신자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신성리(井邑 郡 南一面 新城里 天主堂)성당에 도착하였다. 정읍본당은 1901년에 설정되어 이때 제2대 본당 주임 미알롱(A. Mialon 孟錫浩) 신부가 사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나라 8경(八景)의 하나인 내장산(內藏山)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정읍군은 전라북도의 큰 주(大郡)중 하나인데 전주 광주(光州) 순창(淳昌) 고창(高敞) 부안 (扶安) 등 지방과의 교통의 요지이다. 정읍에 복음의 씨가 심어진 것은 1882년경부터, 즉 전주에서 이곳 신성리로 옮겨 살게 된 김순문(金淳文) 집안과 그 이듬해에 또 이 지방으로 이사 온 김찬경 (金贊京) 배사진(裵四鎭) 김명보(金明寶) 등 신자 가정이 합쳐서 네 가문 27명의 가족이 중심이 되어 정읍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라 한다.

당시 「금구배재 (金堤ㆍ梨峴)」를 임시 근거지로 이 지방 전교를 담당하였던 베르모렐(張若瑟)신부가 1889년부터 이곳을 공소로 순회 전교하다가 서울 신학교로 전임되자 전주 본당의 보두네(尹沙勿)신부가 이 지방을 돌보았고 1897년부터는 목포 본당을 신설한 데샤이예(A.Deshay.es曺有道) 신부가 순창(아천리)에 있을 때 이 지방을 돌보다가 목포(木浦)로 간 다음에도 계속 1901년4월 정읍 본당이 설정될 때까지 순회 전교를 담당하였다.

첫 본당 신부는 진안(鎭安)본당의 김양홍(金洋홍) 신부와 같이 1900년 9월 22일에 서품된 본방인(本邦人) 김승연(金承淵=아우구스띠노) 신부이다. 본당이 신성리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서 등천리(登川里)공소와 신성리 공소가 신부 모시는 본당이 될려고 치열한 경쟁을 했으나 김 신부의 결단으로 신성리에 본당을 세우게 되었는데 김 신부는 신성리에 초가 4간을 사서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성당 부지 1천2백 평을 마련하고 1903년 4월 16일 전임했으며 4월 20일 제2대주임 미알롱(孟) 신부가 부임, 1년 후 김 신부가 마련한 부지 위에의 기와집 성당과 4간의 사제관ㆍ6간의 교회 사무실과 회의실을 신축하고 16년간 전교하다가 신병으로 귀국하였다. 주교 순시 당시 정읍 본당은 정읍군 내 10개소 담양3개소 장성 8개소 부안 4개소 고창 1개 소동 5개 군에 26개 공소가 있었고 신자 수는 1천84명이었다.

10월 10일 전남 나주(羅州)로 가기 위해 정읍을 출발한 드망즈(安)주교 일행은 말(馬)은 탓지만, 달리지는 못하는 보행이었으므로 나주까지를 하루 만에 갈 수 없이 도중 장성 월평장(長城月坪場)에서 어느 여관에 들게 되었으며 다음날인 11일 노안(老安)성당(羅州郡二老面桂良里天主堂)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주 노안은 나주군의 북부에 있는 기름지고 살기 좋은 농경 지대인데 이 고장에 복음이 뿌려지기는 1900년 당시 유일한 전라도 출신 이내수(李내秀=아우구스띠노) 신부가 무안(務安)지방에서 전교하던 때었는데 병인년(1866)교난 때 서울에서 피난 왔던 정요한(鄭洛)이 이 지방에 살던 이 바오로 (李民淑) 이도마(李震緖)를 입교 시킨 것이 신자가 생긴 근원이 되어 나주 지방에 천주교가 차츰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이 이내수 신부는1900년 12월 20일 별세하고 무안 지방에 전교하던 다른 두 분 신부들이 차례로 전교하였고 1908년 목포(木浦)본당 제 2대 주임 위돌(V,Tourneux呂東宣) 신부가 이곳에 본당을 설립하고 다음해 1909년에는 그해 1월 31일에 입국한 요셉 까달스(J.Cada.rs 姜達淳) 신부가 본당신부로 정주(定住)하게 되었는데 까달스(姜) 신부는 부임하여 양옥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 기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신설 본당인 나주 노안은 9개공소, 신자 수 2백91명이었다.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