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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23. 호남의 본당들 3. 용안 안대동·전주

사진 제공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 연구소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4-10 제 135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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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 안대동 - 은신전교의 임시 근거지
전주 - 1908년 남문밖에 새 성당 건축
1911년 9월 2일「플로라안ㆍ드망즈」(安世華) 주교는 교세가 호남 지방들 중 제1의 큰 본당이었던「나바위」(羅岩=華山天主敎會)를 출발, 사목 순시길의 세번째 방문지인 용안(龍安)성당에 도착하였다.

「안대동」으로 불리는 이곳(益山郡龍安面大洞天主堂)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기 훨씬 이전부터 전라도 지방을 은신전교(隱身傳敎)하던「빠리」외방 전교 회원 신부들의 임시 근거지가 되었던 공소로서 1885년부터 호남 지역 전교를 맡았던 조스(JㆍJosse 趙) 신부가 무주(茂朱) 「여우네」용담(龍潭) 「양명이」 「멸치골」 「막골」 「굴고개」 「솔안이」진산(珍山) 「한듬산」 「가새벌」 「차독박이」 「달이실」(月谷) 「용초내」함열(咸悅) 「요왕골」등 여러지방을 돌고 이곳에 이르러서는 과로와 전염병으로 1886년 1월 28일 외롭게 순직하고 그 영구가 임시 초빈(草殯) 되었던 곳이다.

조스(趙) 신부의 후임으로 이 지방 전교를 담당했던 라프리까드(AㆍLafouㆍrcade 羅) 신부는 거처를 고산빼재(高山秀峙)로 옮기었으나 1년반 후인 1888년 7월 14일 병(病名未祥)으로 별세하게 되었는데 이때 전주(全州)와 그 이남 지방 전교단 임자로 부임하는 도중에 나 (羅)신부를 만나려「빼재」에 들렸던 요셉ㆍ베르모렐(JㆍVermorel 張若瑟) 신부는 뜻밖에 나 신부의 임종을 도우고 그 후임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1887년에 우리나라에 입국한 베르모렐(張) 신부는 1888년 7월부터 5년간 호남지방 전교를 맡았다가 1893년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로, 그 후 함경도 원산(元山)지방 전교 담당을 거쳐 1897년5월 다시 충남(忠南)과 전북(全北)지방 전교를 담당하게 되어 안대동 공소를 임시 근거지로 하여「나바위」본당 설립을 준비하게 되었다.

안대동에 근거를 둔 용안 천주교회의 역사는 1890년으로 기원을 삼고 있으나 1911년 당시의 교세 통계(敎勢統計)는 따로 되어 있지 않고, 나바위(華山)본당에 포함되어 있으며 주임신부는 1908년 서품된 이상화(李尙華=발도로메모) 신부이다.

안주교 일행은 9월 22일 용안 안대동을 출발하여 이날 중으로 호남의 수도이며 한국 천주교 회사에 있어 찬연히 빛나는 첫 교 성지 전주에 도착, 보두네 (XㆍBaudounet 尹沙勿)신부가 임시 거처한던 구석리(九石里)에서 4박5일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1791(辛亥)년 12월 윤지충(尹持忠=바오로) 권상연(權尙然=야고보) 두 형제의 장열한 순교의 피로써 성지(聖地)가 된 전주 남문(豊南門)밖 구례영(求禮營) 주인집(殿洞200번지)땅을 1891년 본당 터전으로 잡아 1908년 5월부터 새 성당(고딕ㆍ건축양식의 장점들을 종합한 복합 양식의 건물)의 건축 공사 중이었으므로 보두네(尹) 신부의 임시 거처로 주교를 뫼시게 된 것이었다.

사베리오 보두네(尹) 신부는 1884년 사제 서품 후 일본「나가시끼」 (長崎)에서 1년간 체류하는 동안 우리말을 공부하고 1885년 10월 입국하여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전교했다.1888년 경상도 칠곡「신나무골」(蓮花洞)에서 1년간 전교 하다가 1889년 전주지 방 전교 담임으로 임명되어 전주본당 설립과 전주성당을 건림한 호남의 사도이다.

사진 제공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