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춘수상 릴레이] 8. 봄편지

신달자·시인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3-13 제 134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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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상의 웃음 띠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봄이

봄이여

당신의 이름은 오늘 나에게 이데아로 등장합니다.

나에게 있어 당신의 이름은 누구나 부르는 혹은 당신이란 존재를 호칭하는 대명사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르는 당신의 이름은 적어도 나와의 거리를 최대한 단축시키는 결속의 빛나는 사슬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주여!」하고 부르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듯 봄이여 당신의 이름은 나에게 자아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개념 혹은 영원한 이데아 입니다.

봄이여

지난겨울은 괴로웠습니다.

우선 당신의 존재가 덥히어 볼 수 없으며 우둔한 나는 늘상 당신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어둡고 암담했습니다. 당신이 안 보이는 세상의 그 어디로 내 삶을 지탱할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은 흐려 있었고 나무들은 재 가루처럼 원한을 풀어내는 바람의 성난 손에 잡혀 떨고만 있었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건 바람뿐이라는 두렵고 외로운 지각 속에 겨울이 나를 묶어 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만나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는 당신은 믿을 수 없었고 더욱 나에 대한 사람과 믿음과 약속 그 모두는 먼 곳의 숲에서 들려오는 새의 노래 소리처럼 아쉬운 것이었습니다.

아쉬우면서 새의 노래가 영혼의 울림을 터 주듯 아쉬우면서 새의 노래가 막연한 행복감과 희망과 아름다운 추억을 연상시켜 주는 거와 같이 당신은 내 머리 속에 떠오를 때 마다 청정한 행복감을 안겨 주곤 하였습니다.

봄이여.

겨울의 내 고통은 당신을 찾고자 하는 그 괴로운 탐색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더욱 우리를 사랑에 변함없는 연속성에 대해 알고자 고민했던 나의 허약한 감수성과 부족한 인식이 내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압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너는 아느냐? 봄의 집을-. 봄은 살아 있더냐? 봄은 어떤 모습으로 무얼 먹고 무슨 말을 하며 누구와 같이 있더냐?』

미친듯 황량한 벌판을 찾아 나가 외쳤으며 하늘 바람 별 나무에게도 봄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모두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의 대답이 당신이 살아 있으며 나를 향해 지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내 영육을 억누르던 돌덩이 같은 고통의 무게는 한날 새의 깃털같이 가벼운 것으로 풀려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벼움을 사랑했습니다.

그 암담한 회색으로부터 탈출되는 구원과 평화. 그랬습니다. 그 가벼움은 평화였습니다. 둔탁한 욕망의 군살이 빠져나가고 사물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맑은 영혼 곧 당신의 실체를 느끼는 진정한 인식만이 그 가벼움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을 인정하는데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부저하고 싶은 인간적인 불안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의 원인은 내안에서 강렬한 압력을 가지고 다투었고 나는 그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이 모두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겨울 안 그 죽음 같은 무덤 안에 생명을 가지고 숨 쉬고 있음을 경험으로 말합니다. 겨울 다음에는 반드시 당신이 오게 되어 있는 확실한 계절의 추이를 상식의 기초로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그 무엇보다도 명확한 신(神)에 대한 부활도 부정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듯 내가 당신의 도래를 염려하는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나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었고 나는 아지랑이 같은 환상적인 가벼움으로 당신을 겨울의 공간에서도 부딪히곤 합니다.

봄이여.

사랑은 혼자 있어도 기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모습을 나에게 보이기 위해 겨울의 그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며 오고 있으니까요.

지난겨울의 나의 고통은 나 혼자만 힘든다는 자기애의 몰두였습니다.

새로운 부활과 새로운 언어로써 사랑의 말 생명의 말을 준비하는 당신을 볼 수 없었던 나의 눈은 또 한 번 가당찮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자기애의 몰두」. 실상 사랑에 있어 이것은 마땅히 단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사랑 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사랑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나」를 부수고「나」를 바치고 승화시킬 때 비로소 풍부해지며 사랑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당신은 빈틈없는 척학성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는-그것은 바로 신(神)을 이해하는-사랑의 현대성입니다. 시야를 넓혀야지요. 봄이여 내가 사랑하는 찬미하고자 하는 위대한 이여.

당신은 지금 내 앞에서 있습니다.

만상(萬象)의 웃음기를 띄고 임리의 말씀으로 내 뜰 앞에 다가서서 내게 굳건한 두 손을 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봄이여 나는 이 만남을 체험이나 경험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운명으로-운명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릴케가 루우에게 바친 노래처럼「너극 이슬이다 어머니다 아침이시다 운명이다」라고 찬미한 것처럼-.

신달자·시인